성 정문호(바르톨로메오 1800-1866)
일명 '계식"으로 불렸던 정문호 바르톨로메오는 병인박해가 일어날 당시 그의 나이는 대략 66세였다. 본시 충청도 임천 출신으로
임천에서 천주교를 알아 입교하여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다.
박해로 인해 고향을 버리고 여러 지방을 유랑하다가 1866년 박해 때에는 전라도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골에 정착하게
되었다.
영세입교하기 전에는 원님까지 지냈으나 후에는 모든 관직을 거절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모든이들한테 존경과 사랑을 받을만큼 성품이 착했던 정문호는 교우들에게나 외교인들에게나 차별없이 교리를 밝고 소상하게 가르쳐줄 뿐 아니라 훌륭한 예의 범절도 잘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모든이들에게서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전라도 일대에 박해가 있다는 소문이 나돌게 되자 정문호는 밀사를 전주로 보내어 정세를 알아보게 하였다. 밀사는 오사영이라는 자로 외교인인데다가 그 고을의 관직도 있는 자였으므로
전주 포도청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었으며, 전에 천주교 교리를
조금 배운 일도 있었다.
또한 오사영은 자원하여 교우들을 도아 성심껏 협조해 주기도 하였다.
밀사가 떠나고 이틀이 지나도 아무런 전갈이 없자 정문호는 적이 안심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수상하게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해 12월 5일 저녁 그 마을에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두패로 나뉘어 한 무리는 성지동 마을로 들어가 조베드로와 그의 아들
조요셉, 이 베드로, 그리고 정원지를 체포하고, 다른 한 무리는 대성 마을로 침입하였던 것이다.
포졸들이 정문호 집에 와서는 담배를 살 것처럼 주인을 찾았다.
집주인인 정문호가 문 밖으로 나서는 순간 천주학장이라고 고발되었으니 가자고 하며 끌고 갔다. 이어 다른 두 교우가 체포되어 이들 세 명은 성지동에서 잡혀온 조 베드로 일행과 함께 구진버리에서 하루밤을 묵었다.
정문호는 이때 잡힌 교우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다.
다음날 이 일곱 사람은 비장 감사집까지 압송되어 가면서도 이들 모두의 얼굴에는 기쁨으로 내내 가득 차 있었다. 얼마후에 감사집에 도착해서는 즉시 창고에 갇혔고 성지동에서 잡힌 일행은
전주 감옥 후면에 갇히어 분리되었으나 옥 중에서도 착시라헤 조과 만과의 신공을 드려 치명의 예비를 단단히 하였다. 그리고 일곱명이 한 옥에 있는 것 같다. 처음엔 정문호가 고문과 유혹에 넘어가 배교할 듯 했으나 함께 갇혀 있던 교우들 가운데 가장 열렬한 조화서 베드로가 격려하여 다시 생각을 돌리고 마음을 잡아 평온한 마음으로 치명에 임할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정문호는 순간적이나마 약해졌음을 참회하면서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용감한 마음으로 온갖 고문을 잘 이겨냈다. 또한 그는 원님에게, "나는 천주님을 배반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결심하였소"라고 서슴치 않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처형날인 12월 13일 감옥에서 나오는 순간에도 희열에 가득 찬 얼굴로 열심히 계속 기도를하여 병졸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전주의 숲정이 형장으로 향하는 도중 그는 조화서 베드로를 향하여 "우리는 오늘 천국의 과거시험을 보러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복된 날입니다" 이 말을 받아 조 베드로는,"그렇고 말고요. 우리의 행복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라고 응수하였다.
마침내 사형선고문이 낭독되고 그의 서명이 끝나자 처형준비를 서둘렀다. 그들 모두는 한결같이 평온한 마음과 용덕을 갖추어 처형에 임하였다.
이때 정문호바르톨메오는 1866년 12월 13일 장날 장꾼들이 보는 가운데 숲정이에서 세번째 칼에 목이 잘려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참수치명한 천주의 종 정문호 시체는 오사영에 의해서 용마루재에 묻혔다가 이듬해 1867년 3월 6일 그의 아들에 의해 정원지 베드로, 손선지 베드로의 시체와 함께 전주 근처의 막고개로 옮겨졌다고 한다.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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