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국 보(프로타시오 1798-1839)
묘의박해령이 발표된 후 맨 처음으로 신앙을 위하여 죽은 이는 정국보 프로타시오였다. 103위 성인 중에서 돌아가신 분이 이호영
성인이고, 두번째로 돌아가신 분이시다.
그는 본래 송동의 이름있는 양반가문에 태어났으나 그의 할아버지가 벼슬을 하다가 잘못을 저지르게 되자 이때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자 상민으로 자처하고 서울로 이사하였다.
서울에 와서 국보는 선공감(이조때 토목과 영선을 맡아보던 관청)에서 일을 하였다. 비록 태생이 외인이었으나 온화하고 선량하며 겸손한 성품의 소유자였고 나이 30세가 넘어서야 처음으로 성교도리를 듣고 입교하였으며 수년후에는 프로타시오라나 세례명으로 영세할 수 있었다.
정국보는 집이 극히 가난한 데다 병마저 늘 몸에서 떠날 줄을 몰랐지만 빈궁과 병고를 감수 인내하여 한번도 어려워하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또한 슬하의 14남매를 모두 잃었으나, 그러한
충격마저도 놀라운 체념으로 참아 내었다고 한다.
중국인 유신부가 홍살문 거리에 집 한채를 사서 국보로 하여금
집을 관리케 하는 한편, 시골에서 성사를 받으러 서울로 오는 문밖 교우들을 이 집에서 대접케 하였다. 그는 아내와 함께 열심히
수계하여 교우들에 관한 일이라면 어떤 위험이나 수고도 사양치
않고 헌신적으로 봉사하였으므로 모든 교우들의 귀감이 되었다.
기해년 4월 아내와 한가지로 잡혀 포도청에 갇혔다. 정국보는 포청신문에 혹형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형조에서는 심한
고문과 유혹에 못이겨 그만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미구에 그는 장티푸스에 걸렸다. 이때 그는 배교한 죄에 대하여 심한 가책을 느끼고 날마다 침식을 잃고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마침 한 열심한 교우가 찾아와 권면하니 용기를 얻고 자수할 결심을 했다. 곧 형조로 달려가서 재판관을 찾으니 하인들이 그 연고를 물었다. 배교한 말을 취소하고 죽기가 원이라고 하니 하인들이 도리어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고 돌려 보내 주었다.
다음날 정국보는 또 형조로 가서 판서를 만나려 했으나 역시 거절당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세번째로 시도한 것은 5월 12일이었다. 그가 받은 상처에다 본래의 신병이 도져 도저히 걸어갈 수가 없어서 가마에 실려서 갔다. 역시 하인들이 문을 막고 들여 보내주지 않았으므로 정국보는
형조판서가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형조판서가 나오자 그의
앞에 엎드려 배교한 후 사연을 명백히 말하고 배주한 죄인으로 죽여달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형조판서는 소용없는 말이니 비키라고 하였다.
그러나 정국보는 더욱 답답하고 안타까와진 나머지 큰 소리로 죽여주기를 애원하니 판서도 하는 수 없이 그를 옥에 가두게 하였다. 감옥에 있는 교우들의 축하를 받으며 하옥되는 정국보의 마음은 성스러운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곧 포청으로 옮겨져서 거기서도 정국보는 또 한번 신문을 받고 곤장 25대를 맞은
다음 다시 하옥되었다.
이미 장티푸스로 기력이 쇠약한 데다 이렇게 또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되니 옥으로 돌아왔을 때 정국보는 거의 죽은 사람이나 다름
없었다.
그리하여 그 다음날 새벽 5월 20일 옥중에서 숨을 거두니 그의 나이가 41세였다고 한다.
그가 배교로 교회를 불명예스럽게 하고 교우들에게 나쁜 표양을 주었던 만큼 그의 옥중 순교는 더욱 교회에 명예가 되고 교우들에게는 비록 한번 허약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용감히 참회할 수 있는
모범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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