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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전장운 요한           

 

 

 

 

 

 

    

 

성인 성 전장운 요한  

영문명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66.3.9 순교 
신분 상인  지역 한국 


성 전장운 (요한 1810-1866)


전장운 세자 요한은 일명 '승연'이라고도 불리었다. 병인박해때 순교한 근 만명에 가까운 순교자들 가운데 미구에 시복될 분에 대하여 가장 많은 증언을 남긴 박순집 베드로에 의하면 전장운은 1810년에 서울의 '애외게'에서 출생하여 남문밖 '이묵'에서 살았다
고 한다.

이 성인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어머니가 과부가 되었는데 아주 열심하고 용감한 어머니였다고 한다. 홀어머니를모선 전장운은 불가피하게 농사를 지으며 가죽부대를 만들어 팔아 집안생계를 도왔다. 장운은 1839년 기해년 대박해 때 체포되어 약 한달 동안 갇혀 있었으나 혹형과 고문을 못 이겨 냈고 또한 당시만 해도 아직 신앙이 굳지 못해 감언이설로 배교하여 풀려 나왔다. 그리고 실망한 끝에 교회를 떠나 한때 냉담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열심한 어머니의 권면으로 배교한 것을 뉘우쳤으나, 기해박해 이후 한국에 성직자가 없었으므로 고해할 데가 없었다.

장운은 깊은 실망에 빠졌다. 그러나 본분을 충실히 지켜 김대건 신부가 입국하자 1845년에 회개하였고 한동안 천주님을 덜 사랑하고 배반하기까지 했던 만큼 그분을 더욱 더 사랑하기를 원했다.

그의 열심한 보속과 신앙심은 다른 교우들을 크게 감화시켰다.
결혼해서 세 아들을 두었는데 어떻게나 모범적인 생활을 했던지 그에게 대세주는 권한을 주었으며 1866년에는 교구의 인쇄소일을 맡기기까지 하였다.

장운이 직책을 맡자 마자 이전 주임 임치화(요셉)은 박해가 무서워 숨어 있으려고 떠났다.
전장은 위험을 잘 알면서도 집에 혼자 남아 있었다. 어떤 교우가 그에게 몸을 피하라고 권하였지만 전장운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천주께서 나를 죽음으로 부르시면 내가 어디 가 있든지 붙잡힐 것입니다. 더구나 이 사실은 천주교에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 해도 도망가지 않겠습니다."

마침내 그에게도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상부의 명령으로 포졸들이 1866년 3월 1일 작은 인쇄소에 들이닥친 것이다. 그들을 보자 그는 힘차게 말하였다.
"당신들이 올 줄 알았소. 갑시다."
"네가 이 집 주인이냐?"
"나는 주인이 아니오."
"그렇다면 천주교를 믿느냐?"
"물론이오. 천주교를 믿소."

이 말을 들은 포졸들은 그를 포도청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다시 인쇄소 주인이냐는 질문을 받고,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가난해서 목판을 사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교님과 타협해서 내 품삯으로 값을 치른다는 조건으로 목판을 인수했습니다."
"그렇다면 주인이 어디로 갔는지 말해라" 그러자 장운은 매우 적절하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목숨을 건지려고 피해 가는 사람이 어디로 간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갑니까?"

그 뒤 다시 심문을 받았는데 "너는 서양교를 오래 전부터 믿었고 많은 제자를 가르쳤으니 모두 대라"는 말에 성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으리는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천주교 법에 따라 그 사람들을 댈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의 이름을 대면 그 사람도 나와 같이 고문을 당할 것입니다. 만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을 밀고하지 않겠습니다."

고문을 당하면서 같이 갇혀 있던 동료인 최형 베드로와 같은 무서운 형벌을 받았는데 끊임없이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간구했다.

재판관들은 마음 약한 말한마디나 밀고하는 말한마디도 얻어내지 못했다. 사흘 동안의 신문과 고문이 있은 후 1866년 3월 9일에 사형선고를 받고 선고문에 서명했다.

바로 그 날 전장운은 최형과 함께 56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그리고 성철이라는 희광이는 공교롭게도 전에 교우였고 또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내 어찌 차마 자네 목을 벨 수 있겠소"하며 거절하려 하자, "당신은 임금에게 복종하고 나는 천주님께 복종하는 것뿐인데 무엇을 꺼리는 거요"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의 칼밑에 목을 드리웠다. 성인의 시체는 얼마 동안 이리 저리 들판에 굴러다니는 것을 후에 교우들이 '청파데다리'에서 발견하여 노고산에 안장하였다.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