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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전경협 아가타         

 

 

 

 

 

 

    

 

성인 성녀 전경협 아가타 

영문명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39.9.22 순교 
신분 궁녀  지역 한국 


성녀 전경협 (아가타 1786-1839)


전경협 아가타는 서울 태생으로 부모가 다 외교인이었다. 이미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의탁할 곳이 없게 되자 안형광이라는 궁녀에게 구제되어 그를 맡아 기르게 되니 전경협은 궁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가 결혼할 나이가 되자 그의 오라버니가 경협을 출가시키려 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이 때부터 정식으로 궁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관변측기록에는 경협이 의방궁의 나인이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정조의 빈이었던 의빈 성씨를 가리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궁내에서 경협은 동료 궁녀인 박희순 루시아와 가깝게 지냈다.
그러한 관계로 희순이 입교하게 되자 그도 따라 입교했다. 그러나 얼마 후 희순이 궁내의 온갖 미신행위를 피해 밖에서 보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병을 핑계로 출궁하게 되자, 경협도 그의 뒤를 따르려 했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왜냐하면 오라버니가 그의 신앙생활을 박해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협은 주님을 위해 괴로움 받기를 굳게 결심하고 드디어 병을 핑계로 궁을 나와 버렸다.

친척이라고는 모두 외교인이어서 하는 수 없이 박희순에게 의탁하게 되어 5,6년간 그들은 가난과 비참 가운데서도 서로 의지하며 지냈다.

경협은 궁녀 출신답게 옷차림이 아주 깨끗했고 몸가짐이 단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총명하고 강한 성격이 소유자였다.
항상 몸에 병이 있었으나, 천주께서는 저를 더욱 단련시켜 성덕에 나아가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의 병을 앓게 하셨다고 감사하며 한때 풍부하고 사치스러ㅇ던 궁궐의 생활을 조금도 그리워하거나 후회하는 일이 없고 도리어 고생을 낙으로 여겨 모든 역경을 잘 극복하고 기도와 묵상과 영적 독서를 부지런히 했다.

이와 같이 그의 표양이 겸손하므로 모든 교우들이 탄복할 뿐만 아니라 외교인들도 그를 사모하게 되어 교회에 들어오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기해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경협이 박희순의 집으로 피신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이 무렵에 경협은 박 루시아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수삼일이 못 되어 김여상의 고발로 포졸들이 습격하여 집에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체포하니 경협과 박 루시아 자매 외에도 8,9명이나 되었다. 때는 4월 15일이었을 것이다.

포청감옥에 있던 전경협은 궁녀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문초와 더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포장은 경협에게 "너는 궁녀로서 다른 부녀들보다 탁월한 자거늘 사도에 혹하였다고 하닌 참말이냐?"하고 물었다.

"천주는 천사와 사람과 만물의 임금이시요, 주재십니다. 이 천주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기르시고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여 주시고 착한 이를 상주시고 악한 이를 벌하는 것이며 그분이 우리의 대군대부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를 흠숭하고 섬기는 것이니 결코 사도를 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초 중엔가, 다른 문초 때엔가 이와 비슷한 질문을 받았을 때 아래와 같이 재치 있고 힘찬 대답을 하였다고 한다.
"제목 없이 어떻게 집이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만일 대들보가 집의 가장 중요한 재목이라면 우리를 보존하시는 천주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이가 아니십니까? 그러니 이러한 이유로 그를 공경하는데 무슨 죄가 있다고 하시겠습니까?"

포장은 형벌을 가하기도 하고 혹은 감언으로 달래어 배교를 시키려고 여러 번 꾀하였으나 헛수고였으므로 경협을 형조로 보내었고 형조판서도 포장과 같이 그를 문초하였다.
"너는 궁녀로서 어떻게 나라에서 금하시는 일을 감행한단 말이냐?
천주를 배반하고 동료글 고발하고 네 책이 있는 곳을 말해라."
"만번 죽을지라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다섯 차례나 삼릉장{세모진 방망이}으로 몹시 맞아 살이 헤어져 떨어져 나가고 뼈가 부러지고 피가 땅을 적시었으나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않고 이런 혹형을 참아받아 그의 변함없는 용기를 본 외교인들까지도 모두 놀라와 하였다.

이 때 전경협의 덕분으로 상당히 벼슬을 지내게 된 외교인이던 그의 오라버니는 그 자리를 잃을 것을 걱정하여 거듭 찾아와서 동생에게 배교하기를 청하고 또 간청하였다. 그러나 경협은 위험과 매를 견디어 나간 것과 같이 그의 간절한 청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이에 그 몹쓸 오라버니는 동생을 독살하려고 꿀과 계란을 납으로 만든 과자를 동생에게 보냈다. 경협은 약간 수상한 생각이 들어서 그것을 먹기 전에 비녀로 찔러 보니 비녀가 과자에 닿자 빛이 변하였다. 경협은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이상은 그의 조카딸의 증언인데, 기해일기에는 경협이 독약이 섞인 음식을 모르고 먹었으나 독을 토하여 죽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그의 오라버니는 만일 동생이 형장에서 공공연하게 처형되는 날이면 그의 지위를 잃게 될 뿐만 아니라 패가망신하기 때문에 이것으로 단념하지 않고 형리 중에 으뜸되는 자가 찾아가서 뇐물을 써서 동생을 매질하여 죽여 달라고 청하였다.

형리는 이 청을 받고 경협을 형벌하였으나 죽이지는 아니하였다. 재판관도 이와 같은 끈기를 보고 놀라, "거 참 고약하군! 이 색시는 한마디만 하면 놓여 나가서 편안히 살 수 있을텐데"하고 말하였다.

경협을 그다지도 몹시 학대하게 하던 오라버니의 딸은 "고문으로 인하여 받은 상처가 겨우 하루 사이에 나았을 뿐 아니라 흔적까지 씻은 듯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하며, "그것은 참으로 기이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였다.

자기 오라버니의 청에 의하여 자기는 죽을 때가지 옥에 갇혀 있게 되리라는 말을 들은 경협은 순교의 영광을 얻지 못하게 되는것을 섭섭히 여겨 지극히 겸손한 태도로 "이것 내 탓입니다. 나는 평생에 많은 죄를 지었고 공은 하나도 없으니까요."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마음 속에 깊이 피를 흘릴 희망을 버리지 아니하여 "모든 것이 천주의 명으로 되는 것입니다. 옥안에서 죽는 것만 하여도 내게는 큰 은혜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칼을 받아 치명하였으면 합니다."하고 말하였는데, 돌연 1839년 9월 26일 옥고 6개월만에 동료 8명과 같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치명의 영광과 동정의 화관을 얻게 되니 인자하신 천주께서는 결국 경협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 허락하신 것이다. 그의 나이 53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