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장주기(요셉 1802-1866)
장주기 요셉은 본래 잇름을 낙소라고 불렀는데 1802년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 경기도 화성군 양감면 육당리) 고을의 부유한 집안에
서 태어나 농사르 업으로 하고 있었지만 한문을 잘 아는 유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가족 전부를 입교시켰던 열심한 교우인 형수 김
바르바라의 덕택으로 입교하게 되었다.
병술년(1826)에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었을 때 양지고을로 보내져서, 거기서 두번째로 조선에 입국한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은 후 자기 부인과 자녀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모두 세례를 받게 하였다, 그의 천주교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갚은 신앙심,
그리고 매사에 신중함을 보고 1839년에 순교한 모방(나)신부는 그
를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장주기는 죽을 때까지 이 직책을 다하였다. 그가 얼마나 열심한 교우였던지 교우들은 "저런분은 또 다시
없다"고 입을 모았다.
그는 박해 때문에 네번이나 시골에 피신할 수밖에 없었으며 깎아지른 듯한 산에 둘러싸인 조그만 골짜기에 12년 동안 살고 있었는데 메스트르(이)신부가 외교인들의 눈을 피해 그 곳에 와서 신학교를 세웠다.
이 선교사는 이곳에서 장주기의 집 부속건물 모양으로 학교를
짓고 푸르티에(신)신부가 올 때까지 학생 세명과 함께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프르티에 신부는 1856년에 와서 프티니콜라(박)신부의
도움을 받으며 신학교를 관리해 나갔다.
장주기는 명의상으로는 신학교의 주인이었고 실제로는 헌신적인
경리 책임자였다. 그이 신중하고도 솜씨 있는 운영 덕분에 이 작
은 신학교는 천주교를 금하고 사형으로 벌하기까지 하는 나라에서
11년동안이나 존속할 수 있었다.
또한 신학교의 농사일과 기타 모든 잔일을 보는 한편 배론의 회장으로서 이웃에 있는 교우 공동체에 많은 도움을 주교 교리를 가르치며 외교인을 귀화시키는 데 열중하였다. 그는 매일 미사에 참례할 뿐 만 아니라, 아침마다 북을 쳐서 미사시간을 알리었다. 그
는 신부가 어디를 갈 때나 병자를 찾아갈 때 꼭 따라다녀서 선교사의 오른팔 노릇을 하였고 마치 수사와도 같은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그는 교회에 공헌하였다.
여러 번 어쩔 수 없이 이사를 다녀 이로 인해 입은 손해로 파산을 했으나 그는 봉사에 대한 대가를 도무지 받으려 하지 않고 스스로 일을 해서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 따라서 그를 무사무욕은 그만큼 더 우러러 보였다.
1866년 3월 2일 포졸들이 배론 골짜기를 덮쳤을 때 그들은 선교사들의 말에 따라 동네를 떠나가던 노회장 장주기를 제일 먼저 붙잡았다.
"너는 누구냐?"
"나는 학교집 주인 장낙소요." 그러자 포졸들이 말하였다.
"그러면 네 서양인 선생들과 같이 가자."
장주기는 그의 스승들과 같이 있게 된 것을 매우 기뻐서 누가 그
의 석방을 위해 부탁해 주기를 원치 않았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
까?"하고 그는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르티에신부는 이 노인의
공로가 크다는 것을 알고 또 앞으로도 많은 구원의 일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포졸들에게 부탁을 하였다.
"이 불쌍한 노인을 잡아다 무엇하겠오. 제 발로 걸어서 무덤으로
가게 내버려 두시오."하며 돈을 집어주자, 포졸들은 그를 놓아 주었다.
군사들이 붙잡힌 사람들을 데리고 그 이튼날 떠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장주기는 선교사들과 같이 집에 그대로 있었다. 포졸들은
천주교인 집을 약탈해서 배를 채웠다. 다음날 서울로 향해 출발했는데 장주기는 소를 타고 멀찌감치 두 신부의 뒤를 따랐다. 이를
본 신부는 포졸들을 꾸짖었다.
"당신들은 이 노인을 그냥 놓아 준다고 약속하지 않았소? 그러니
저 노인을 돌려 보내도록 하시오." 그러자 포졸들은 "알겠소"하고는 장주기를 돌아가도록 강요하였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할 수
없이 신학교로 돌아와 닷새 동안을 머물렀다. 그런 다음 먹을 것이 떨어졌으므로 배론에서 30리쯤 떨어지 노럴골에 살고 있는 어느 교우집으로 양식을 구하러 갔다.
그가 그 곳에 도착하자 마자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포졸들은 대부분 이 배론에서 신부를 체포하는데 끼었든 자들이라 장주기 회장을 알아보고, "네가 여기는 무엇하러 왔느냐? 네 뜻이 수상하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곧 그를 체포해서 다른 교우들과 함께 제천 관장에게로 데려갔다.
관장은 장주기에 대한 고소내용을 들은 다음 이에 관해 서울에
의견을 물었다. 서울에서는 장주기가 정말 서양 신부들의 집주인
이면 그를 서울로 보낼 것이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배교시켜서
집으로 돌려 보내라는 회답이 왔다.
관장은 신문을 시작했다. 신원, 천주교 입교 여부 등 통상적인
질문을 끝낸 다음 물었다.
"네가 정말 서양 신부들의 집주인이냐?"
"예, 틀림없습니다. 제가 집주인입니다."
"거짓말 마라, 네가 아니고 이 아무개라고 하는데," 관장은 신학교에 살면서 한문을 가르치던 이경주 베난시오라는 양반선비를 암시
하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제가 집주인입니다. 이씨는 그저 학교의 선생이었을 뿐
입니다"하고 장주기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너를 서울로 보내겠다."
그래서 장주기는 다시 옥에 끌려갔다.
관장은 장회장의 위엄과 성실한 태도에 감동해서 그를 살리고
싶었고 그의 부하들도 장회장에게 유리하도록 말을 했다.
그러나 관장은 장주기가 "나는 천주교인이 아닙니다"라는 한마디 말을 결코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자 그를 도무지 동정할 필요가 없는 바보로 취급했다.
관장이 다시 중앙정부의 의견을 물으니, 중앙에서는 그를 붙들어 서울로 데려오라고 포졸 네명을 내려보냈다.
포졸들이 여러 천주교인이 누워 있는 옥문 앞에 와서, "서울로
가게 된 자는 일어서라"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곧 장주기는 기쁘게
그들앞에 나섰다. 그의 당당한 풍채에 놀란 포졸들이, "겁내지 마시오, 서울까지 조용히 모셔드리겠소"라고 말하자 장주기가 이렇게
대답했다. "무엇을 무서워 하겠소? 오히려 나는 원을 풀게 됐소."
그들은 회장에게 차양이 내려진 노란 패랭이를 씌우고 붉은 밧줄로 걸쳤으나 포박은 하지 않았다.
구류간에 갇힌 후 그는 문초를 받았고 포도청에서 찾고 있는 교우 이경주에 대한 말을 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고문을 당했다.
그는 배교하기를 계속 거부했고 서양신부들의 집주인임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1866년 3월 22일자 일성록에서는 다블뤼, 오메트르, 위앵 등 서양인들과 사교를 따르는 황가를 모두 포도청에서 충청도 수영으로
보내 참수하고 효수하여 훈계가 되게 하라는 왕령이 기록되어 있다.
1866년 3월 24일자 승정원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보고가 기록 되어 있다.
<포도청에 갇혀 있던 죄인들, 다블뤼, 오메트르, 위앵, 황 장주기등 도합 다섯명이 포졸들에게 넘겨져 충청도의 수영으로 압송되었
음을 전하께 아룁니다.>
충실한 장주기 요셉 회장도 주교와 그의 일행과 함께 1866년 3
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이라는 해변가 모래사장에서 군문효수
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시체들은 4일간 그대로 버려진 채 있었는데 그동안 지방에 많이
있는 개나 까마귀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사흘째되는 날 저녁에 그 근처에 사는 외교인들이 바로 형장에 모래를 파고 시체를
묻었다.
몇 주일 후 박해가 약간 뜸해질 무렵 교우들이 시체를 거두어
그 곳에서 30이쯤 떨어진 흥산 고을에 안장하였다.
1882년 백주교가 유해를 찾게 하여 일본으로 보내었는데 1894년
다시 찾아와 용산신학교에 안장하였더니, 후에 민주교에 의하여
명동대성당 지하실의 유해를 모신 곳으로 옮겨졌고 양화진 성인
유헤 안치소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