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장성집
(요셉 1785-1839)
서울 옥중에서 나흘 동안 남자교우 한 명과 여자 교우 두 명이 차례로 별세하였다. 그들의 일생은 매우 달랐으나 똑같은 성총의
샘에서 길어낸 그들의 영웅적 행동으 다 같이 훌륭한 것이었다.
여자교우 이 바르바라, 김 바르바라는 전술하였고 남자 한분이신
장성진 요셉은 서울 밑바닥 사회에서 출생하여 한강변 서강에 살
고 있으면서 와우산 밑에 있던 광흥창(이조때 관원의 녹봉에 관한
사무를 맡아 보던 관아)에서 일하며 매우 가난하게 살아나갔다. 그
러나 미구에 상처한 그는 일자리마저 잃게 되자 교우이던 그의 외
숙모가 한때 그를 먹여 살렸다. 이어 재혼했으나 다시 상처하였고
약국에 취직하여 약방주인의 장사를 도왔다.
그의 성품은 양순하고 온화했던 반면에 곧고 강직하기도 하였다. 나이 30세의 중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교이야기를 듣고 예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이신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했다는 교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무식한 그는
박학한 철학자처럼 천주강생의 신비에 대하여 한때 떠들어 댔다.
성 바울로는 일찌기 이러한 문제에 대답하여 말하기를 "이는 유대아 사람에게는 배반하는 일이 되고, 희랍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
일 것이나, 부름을 받은 유대아 사람과 희랍 사람에게 있어서는
천주의 큰 능력으로 되고 지혜이신 그리스도로 된다(1고린1,23-24)라고 말하였다. 장성진은 이러한 의심이 생겨 끝내 풀지 못하자
점차 신앙의 취미를 잃고 교리를 배우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는
다시 외인친구와 상접하고 세속정신에 물들어 아침 저녁 기도마저
하지 않고 오로지 잘 살고 돈 벌 생각밖에는 하지 않았다.
이렇게 신앙을 저버리고 사회의 유혹에 빠진 그는 회두시키려고
여러 교우들이 찾아가 권유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그런데 하루는 한 유식한 교우가 그의 의심을 풀어주는데 성공함으로 성진은 회두하였다. 이 때에 그는 "내가 전에 냉담한 것은
전혀 세속의 유혹에 빠진 때문이다"하며 과거의 잘못을 깨닫고 다시 열심해지고 교회규칙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뿐더러 세상의 유혹을 한층 효과적으로 피하려는 뜻에서 성진은
외인과의 접촉을 일절 끊고 두문불출, 기아와 추위도 아랑곳 없이
오로지 기도와 묵상에만 일관하였다.
집안 사람들은 빈궁으로 이같이 고통받는 것을 걱정한 나머지,
"이전처럼 출입도 하고 몸도 좀 돌본다고 해서 무엇이 나쁘겠는
가"하고 외출을 권해 보았지만, "나의 지난 날의 죄가 오로지 의식
을 풍족히 하려는 욕망에서 왔던 것이므로 포식난의하여 죄를 짓느니 차리리 주님과 추위를 택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장사를 하자면 고직식해 가지고는 돈을 못벌겠고 돈을 벌려면 거짓말을 해야 되겠으니 이는 영혼의 멸망을 자초하는 일이 아니겠소. 차라리
육신 생명이 굶어 죽는 것이 낫지 어찌 양심을 속여 영혼을 죽이
겠소!"라고 말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세상 잠시 괴로움을 견디어냄으로써 죽은 후에 천국에 가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면 이 어찌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하고 변호하며 조금도 굽히려 들지 않았다.
이렇듯 그의 굳센 정개와 독실한 수계생활에 모두가 경탄해마지
않았다.
마침내 1838년 4월에 성세와 견진을 받았다. 기해년 박해 시초에 이미 잡힌 약간의 교우들이 불굴의 신앙에 감격하여 성진은 돌연 자수할 뜻이 간절해져서 대부를 찾아가 상의했다.
그러나 "주명은 기다릴 것이요. 자기의 힘을 믿을 것이 못된다"는 대부의 만류로 일단 중지하고 주명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후
박해가 치열해질수록 혹형에 굴하지 않는 교우도 점점 많아지는것을 목격한 그는 순교를 사모하는 마음이 날로 더해감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그 해 5월 18일 그의 소원이 성취되는 날이 왔다. 성진의 딸 장로사의 증언에 의하건대(장로사는 시복수속을 위한 교황청 조사록에서 그의 아버지 장성진의 생애에 관하여 상당히 상세한 증언을
남겨놓았다) 로사의 시동생의 고발로 아버지가 포졸들에게 잡히게
되었다는 것인데 과연 며칠 후 로사 자신이 아버지 집으로 달려가
하녀로부터 아버지가 잡히던 당시의 정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포졸들이 달려들었을 때 마침 장성진 요셉은 열병을 앓고 있을
때인데 성진은 "아이고! 이러다가는 순교할 기회를 놓치는 것인가"
하고 크게 걱정하고 있었던 중이라 마음 속으로는 기뻐했으리라고
생각된다.
포졸들이 그를 가마에 태워 끌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나같은
죄인이 감히 교군을 타고 가다니"하며 결국 가마를 마다하고 스스로 걸어가는 겸손의 모범을 보였다.
옛날 친하던 외교인들은 걸어서 포졸들은 다라가는 성진을 보고
따라가며 "자네 이렇게 될 줄이야 누가 생각했겠는가?" 이렇게 그
정상을 슬퍼하여 세상복락을 내세워 달래기도 했으며 포졸들 역시
여러 방법으로 유인했다. 이는 성진의 성품의 아름다움과 그 생명을 아깝게 여긴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진은 그들의 권고를 듣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천주교 도리를 해설하여 주었다.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천주님 계시니 사람들은 마땅히 그를 공경하여야 하며, 또 천주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기르시고 보존하시며 착한이는 천당에 올려 상주시고 악하자는 지옥에 내려 벌하시니 어지 짧은 인생을 사랑하며 영원이라는 대사를
위태롭게 하며 그것을 잃어서야 되겠습니까?" 이러한 변론을 하기에 여러 시간을 보내었다.
포졸들은 거의 한나절 동안이나 그에게 배교를 강요하며 갖가지로 괴롭혔으나 성진의 대답은 추호도 허약한 빛이 보이지 않았다.
이를 본 포졸들은 부득히 포청에 가두었다. 옥에서 밤새도록 형벌받기를 고대했으나 며칠을 두고 감옥 한 구석진 곳에 내팽개쳐
두고 문초도 없고 형벌도 없자 성진이 소리를 질렀다.
"사형에 처하라고 잡아온 사람을 어째서 형벌도 하지 않고 이렇게
내버려 두는 거요."
아무리 여러번 이 말을 되풀이하여도 아무 대답이 없으므로 그
는 감방에서 나와 더 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다. 포교가 그 소리를 듣고 어째서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병으로 인하여 헛소리를 하는 것이라고 대답하니 다시 옥에 가두라고 명하였다.
장성진은 "헛소리가 아니라 신념을 가지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하고 대답하였으나 그의 말을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얼마뒤에 포장이 그를 문초하여 배교하기를 거듭 강권했으나 그말에 대답하는 대신 천주교 교리 및 조목을 설명하여 주었다. 그
뒤 곤장 25대를 맞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아니하였으며 감옥으로
돌아와 즉시 절명했다. 때는 5월 26일이요, 나이는 5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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