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임치백 (요셉 1803-1846)
임치백 요셉은 관변측 기록에만 치백이라고 나올 뿐 군집이란 이름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그는 서울로부터 그리 멀지않은 한강변(마포)에서 출생하여 어렷을 때 어머니를 여의고 홀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
으나 천성이 순량하고 정직하여 덕행을 쌓았다.
임치백은 12년 동안이나 글방에 다니어 문한을 배우고 활도 잘쏘며 시, 음악, 그림도 잘하여 친구가 많았으나 그의 아내와 아들이 먼저 입교하여 그에게도 세례받기를 권했으나 그는 항상 "뒷날에 입교하겠다"고 말하였다. 치백은 교우들을 깊이 신용하여 그들을 형제처럼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을 무엇보다 즐겁게 여겨 몸둘 곳이 없는 4-5명을 그의 집에서 살게 하였다.
그의 집에는 항상 많은 교우가 드나들었으므로 그도 신앙을 같이 하는 사람으로 여겨져서 이웃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비난을 받았으나 이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1835년 그의 친구 몇명의 교우가 잡히게 되니, 그는 다른 교우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의 이름을 포교의 명단에 넣게 하였다.
1846년에 아들인 임성룡 베드로는 김대건 신부를 따라서 연평도를 나갔다가 5월 5일 김신부와 더블어 잡히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치백은 곧 아들이 잡혔다는 마을로 가보니 이미 아들은 황해도 감영으로 넘겨졌으므로 그는 그 길로 다시 해주로
달려가서 아들의 석방을 청원하였다.
이때 황해감사는 치백의 요구를 들어주기는 커녕 그를 잡아서 옥에 가두고 "너는 천주교를 믿고 있느냐?"하고 물었다.
"비록 오늘까지 실천하지는 않았으나 어찌 천주를 공경하고 섬길 마음이 없겠습니까?"하고 대답했다. 그래서 소위 사학죄인 취급을
받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의 포졸들은 마포의 임치백 집을 습격하고 남은 식구들은 붙잡아 가는 동시에 집과 가산을 완전히 몰수하였다.
서울로 잡혀온 임치백은 감옥에서 김대건 신부와 만나 신덕에 불타는 신부의 말을 들으며 크게 감동되었다. 이리하여 어느 날
그는 같이 갇힌 교우들에게 "나는 오늘부터 성교를 믿겠다. 너무
오랫동안 끌어왔다"라고 말하였다. 김신부는 그에게 "당신이 옥에
갇히게 된 것은 천주의 특별한 은혜이오니 감사와 지성으로써 이에 응하여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이에 임치백은 그날부터 기도문을 배우고 며칠 후에는 신부의 손에 의하여 요셉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는 박
해때에 옥중에서 영세한 두번째의 성인이며 그 첫번째는 1839년에
순교한 김 아가다 성녀이다.
임치백 요셉의 친구들은 어떻게든지 그의 목숨을 구제하려고 그에게 배교하기를 거듭 권하였으나 그는 "천주는 나의 임금이시며
아버지이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을 결심을 하고 있고, 이미 죽은 사람이니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 후 3개월이 지나 그는 포도대장에게 나가서 사형선고가 있으리라는 소문을 듣고 얼굴에 즐거운 빛을 보이면서 같이 있는 교우들에게 "나는 본래 아무런 공적이 없으나, 천주의 특별한 은혜로
여러분보다 앞서서 천국에 가게 되면 반드시 천국에서 내려와 여러분의 손을 잡고 아버지이신 천주의 나라로 안내할터이니 여러분은 특히 용기를 내시오"라고 말하였다. 이어 15분쯤 지나서 과연
그는 포도대장앞에 끌려 나가 포장과의 사이에 다음과 같은 말을
주고 받았다.
"너는 사실 천주교를 믿고 있느냐?"
"예, 감옥에 들어온 후 기도문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면 천주십계를 외워 보라."
"저는 아직 외울 수가 있도록 되어있지 못합니다."
"십계조차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천국에 가려면 여기에 있는 이 마티아(이신규:이승훈의 아들)처럼 유식해야
하느니라."
"제 말을 좀 들어보십시오. 자녀들이 많은 큰 집안에는 큰 자식도 있고 작은 자식도 있습니다. 또 영리한 자식도 있고 둔한 자식도
있으며 어머니께 매달리는 젖먹이도 있습니다. 크고 영리한 자식들은 아버지를 알아보고 깨닫는 재능이 크나 둔하고 나이가 적고
더구나 젖먹이들은 아버지를 알아보고 깨닫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모든 자식들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은 한결 같습니다.
우리 성교회 집안에서 나는 갓난아기입니다. 비록 천주님을 잘 모르지만 우리 아버지이신 줄은 잘 압니다. 나는 그를 사랑하기를
원하면 그를 위해 죽기를 예비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포졸들이 천주께 욕되는 말을 함부로 지껄이니, 임 치백은 "여보, 이 마티아씨! 당신은 총명하고 박학한 사람으로 천주님께 대해서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나이도 지긋하고 교리도 밝은데 나는 무식해서 답변을 못하지만 당신은 왜 듣고도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소?"
하였다.
"잔소리 말아라. 배교하면 살려주되, 그렇지 않으면 죽여버릴 뿐이다."
"천주를 버리다니 천만번 죽어도 못하겠습니다."
"너는 이번 사건에 전혀 연루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도 어째서 꼭 죽으려만 하는가. 참 이상하구나. 배교하기가 싫으면 여기서 나가네 두아들을 석방시키고 싶다는 한마디 말만 하여라."
"나는 신부님과 더불어 죽을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신부님과 같이라니 그 신부님은 죽을 까닭이 없다. 정부에서는 그에게 벼슬을 줄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너는 혼자서 죽어가려느냐?"
"나는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신대로 되지않을 것을 뻔히 알고 있습니다."
이에 포도대장은 그를 고문하라고 명하여 대꼬챙이로 치백의 살을 찌르게 하고 세번이나 주리를 틀게 하였다. 이때에 치백이 으응하는 소리를 내게 되니 포장은 "만일 네가 그러한 소리를 내면
그것으로써 배교행위라고 보겠다"고 소리쳤다.
이에 치백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잔악한 고문을 받아 기절한 것처럼 보이니 형리들은 급히 그를 밖으로 내다놓았다.
이리하여 옥으로 돌아왔을 때 치백은 마치 유쾌한 산보로부터 돌아온 것처럼 벙글벙글 웃으면서, "나는 고문을 받았는지 안받았는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라고
말하고 흙바닥에 누워서 조용히 쉬었다;. 조금 있다가 남경문 베드로가 온 몸에 상처를 입고 고문장으로부터 돌아오니 임치백은 그의 상처를 돌봐주는 한편 그를 위로하였다.
그 후도 치백은 거듭거듭 고문을 받았으나 그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므로 8월말에는 때려 죽인다는 명령이 내려져 다음달 9월에는 정오때부터 해질 때까지 옥리들이 치백에게 뭇매질을 하였으나
그로 말미암아 아마 그들 자신이 기진맥진하게되어도 치백의 목숨
이 끊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 그를 옥안으로 끌고와서 목을 매니, 임 요셉이 큰 소리로, "오 주여!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하고 숨을 거두었다.
때는 1846년 9월 20일이며 그의 나이 43세였다.
그 다음 날에 임치백의 두 아들이 감옥으로 찾아와서 몹시 슬퍼함을 보고 옥지기와 다른 죄수들은 그들에게, "그리 슬퍼할 것 없소, 어제밤에 당신들이 아버지의 몸에 이상한 빛에 둘러싸여 있어서 온 방안이 환하게 비치었으니까요"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알 수
없는 일에 크게 감동된 것같이 보이어 옥지기는 하늘까지도 존경하는 듯이 보이는 이 사형수의 시체를 공손히 매고 감옥으로부터
5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언덕위에 묻었다.
사형자를 이렇게 곱게 묻어주는 일은 조선왕조시대에는 전혀 볼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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