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이정희(바르바라, 1798-1839)
이정희는 시흥 봉천땅에서 어머니 허계임과 시골양반인 외교인 아버지 이씨 사이에서 1898년에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열렬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나, 외교인이며 천주교 신자를 몹시 미워하는 아버지 때문에 이들은 기도와 수계를
몰래 할 수밖에 없었고 집안의 귀찮은 일을 수없이 당해야 했다.
이정희가 시집갈 나이가 되자 아버지는 어떤 외교인 청년과 약혼시키었으나, 크나큰 신앙정신과 대단히 강렬한 의지력을 나타냈다. 이정희는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이 결혼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다리를 못 쓰게 되어 일어날 수 없는 체 하였다.
그 여자는 이래서 늘 앉거나 누워있었고 결혼이 연기된 후 이러한 고통을 3년동안이나 견디는 항구심을 보여 주었다. 3년이
지나자 약혼자는 그 다리가 낫기를 기다리다 지쳐서 딴데로 장가
들고 말았다.
사건의 내용을 속속들이 알고 있던 어떤 신자가 그에게 곧 청혼을 하여 간신히 직산에 사는 한 교우에게 시집갈 수 있었다.
그러나 동거 2년만에 남편을 여의고 게다가 수계하기도 불편해서 봉천마을 친정에 와서 얼마동안 지냈으나, 결국 서울의 동생(이영희)집으로 가서 자매와 함께 의지하면 지냈다.
한 때는 고모(이매임) 집에서도 있었다고 한다.
4월 초순 판공성사를 보러 상경한 모친과 함께 일가족 4명이 포장으로 찾아가 자수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이 얼마나 용감히 자수하였고, 옥중 고초와 형벌을 얼마나 씩씩하게 참아받았는가는 앞에서 기술했거니와 이매임의 조카 이정희도 그와 못지 않게 형벌을 당하고 용기를 보여주고 같은 고문을 당하였다.
이정희는 순교에 앞서 옥중에서 올케에게 보낸 편지에서 5명의 순교자를 낸 자기 가문의 영광을 자랑하면서, "우리 집안은 의심없이 동양에서 첫째가 될 것이니 열심 수계타가 이후 천국에서
같이 만납시다"하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형조에서 다 같은 날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고모와 동생은 먼저 순교하였고, 어머니보다 23일 앞서, 1839년 9월 3일 서소문 밖에
참수치명하니 그의 나이 41세였다. 이정희 바르바라 성녕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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