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이윤일
(요한 1822-1867)
일명 '제헌'으로도 불리는 이윤일 요한은 충청도 홍주 출신의
중교우였으나 고향을 등지고 경상도 문경의 여호목골에 이사하여
정주하고 있었다. 그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결혼하여 슬하
에 자녀를 낳아 기르고 있었으며 회장으로 활동했다.
이윤일은 키가 큰데다 길고도 숱이 많은 수염까지 기르고 있어
특색이 있었고 또한 신심이 깊고 열렬했으며 성품이 온순하고 솔직담백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의 가정은 역대로 내려오는 신앙가문으로서 선친들 중에 여러 분들이 전교회장을 지냈었다. 이윤일도 가풍을 이어받아 온갖 가능한 방법과 노력으로 자기
본분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때는 1866년 시월 상달 11월초 성인 이윤일 요한의 아들 이의서의 증언에 의하면 이윤일은 포졸들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집에 그냥 앉아 있었다. 물론 피할 수도 있었지만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기를 더 원했던 것이다. 그는 이미 순교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포졸들이 이윤일에게 "이 마을을 대표하는 집주인이 누구냐? 천주교를 믿는 자가 누구냐?"고 묻자 그는 선뜻 나서서 "바로 나요"
하고 말하면서 점잖게 말하였다. 계속해서 "이 마을 밖에도 천주교를 믿고 행하는 자가 있느냐?"는 포졸들의 물음에 부정하였다.
이 때 그와 함께 체포된 교우들의 수는 거의 30여명이나 되었는데 이들 중 이윤일의 집안사람은 8명이나 들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문경으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혔다.
때마침 현감이 공석중이라서 심문은 없었으나 그 반면 포졸들이
설쳐 돈을 뺏을 목적으로 이윤일을 고문한 후 끝내는 집에까지 가서 재산을 모두 이탈해 갔다. 여하간 포졸들은 이 곳에서 사흘간을 끌다가 다시 사주고을로 다시 압송하였다. 이윤일에게는 목큰
칼(죄수에게 씌우는 형구)를 씌우고 발은 쇠사슬로 묶었다.
상주에 도착하자 이윤일은 세번씩이나 끌려나가 문초를 받았는데 이때마다 자기는 천주교 신자임을 더욱 다짐하며 또한 자기와
함께 잡혀 끌려온 교우들외에 다른 동료는 없다고 똑똑하게 잘라
말했다. 상주목사가 배교한다는 말을 한번만 하라고 유혹해 봤지만 이윤일은 한사코 거절해 버렸다.
그리고 계속된 여러가지 잔인한 고문과 형벌을 크나큰 용덕으로써 참아 견디어 나갔다. 한편 상주목사는 마지막 문초를 마친 다음 여러곳에서 끌려온 70여명의 교우들을 세편으로 갈라 세웠다.
첫째는 집으로돌려 보낼 배교한 자들과 어린 애가 있었고, 둘째
편에는 신앙을 고집하기 때문에 처형될 21명이 있었으며 세째편에는 이윤일과 같은 소위 사교의 두목들이었다. 상주목사는 또한 죄수들에 대한 보고를 서울로 보낸 후 하교를 기다린던 중 1867년 1월 4일 대원군이 임금의 윤허를 얻어 군중에게 교훈이 되도록 결정적인 명령이 내렸다.
그리하여 이윤일과 회장 김씨 형제에게 사형선고문이 낭독되고
세번씩이나 곤장을 때린 후 이윤일과 세째편에 낀 그의 동료 김씨
형제는 상주를 떠나 관찰사가 있는 대구로 가게 되었다.
이윤일은 대구로 데리고 가서 쳐형한다는 선고를 듣고 기뻐했다. 떠나면서 그는 아들에게 말했다.
"나는 순교하러 간다. 너희들은 집에 돌아가서 열심히 천주계명을 지키고 후에 나를 따르거라."
이러한 태도에서 볼 수 있는 용기를 이윤일은 기도에서 얻어낸
것이니, "그는 항상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같이 잡혔던 일행이 말했으니, "그는 사람들이 힘을 복돋아 주고 격려했고 무거운
칼을 쓰고 있는데도 늘 웃는 얼굴로 있었고 기쁜 듯이 보였다"고
덧붙였다.
대구에서 억류된 기간은 얼마되지 않았다.
1867년 1월 21일 신앙증거자들은 남문밖으로 끌려 나갔다. 사형수들에게 아주 푸짐한 식사가 제공되었다. 두 김씨 형제가 눈물을
흘리자 이윤일은 용기를 내라고 그들을 격려했으며 윤일은 기뻐하며 맛있게 식사를 했다.
그리고 나서 망나니를 불러 주머니속에 있던 엽전 스물 다섯 닢을 주며 말했다.
"이것을 재물이라고들 하는데 나는 주머니에 이 돈을 지닌 채 죽지는 않겠네 이걸 받고 내 목을 단칼에 자르게."그리고 자기가 직
접 나무토막을 갖도 목을 받혀 놓고는 망나니의 칼을 기다렸다.
결국 사교죄인이라는 죄목으로 김씨 형제와 함께 대구 남문밖
관덕방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니 그의 나이 45세였다.
참수형이 집행되는 순간까지 울고만 있던 회장 김씨형제와는 좋은 대조가 되어 길이 찬양의 말을 듣고 있다.
이윤일 요한의 시체는 교우들에 의해 그날밤 형장 근처에 임시로 묻었다가 3년후 날미 뒷 산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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