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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이영희 막달레나       

 

 

 

 

 

 

    

 

성인 성녀 이영희 막달레나  

영문명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39.7.20 순교 
신분 동정  지역 한국 


성녀 이영희 (막달레나 1808-1839)


이영희 막달레나는 서울에서 그리 멀지않은 시흥 봉천골의 가난한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허계임(막달레나) 언니 이정희(바르바라) 고모이던 이매임(데레사) 등 집안에 열심한 교우도 있으나, 아버지는 그렇지가 않다.
천주교를 반대하는 아버지는 영희가 17세 되던 해 그를 외인과 결혼시키려 했다. 그러나 동정지키기를 간절히 원하였기 때문에 거절하기로 결심하였으나 아버지의 승낙을 얻지 못할 줄 알고 집을 뛰쳐 나가기로 하였다.

음력 11월 16일 이 날은 이영희의 생일 전날이었다. 그의 집에는 젊은 여교우가 하인으로 있었는데 그에게 자기의 결심한 바를 밝히고 나서 다른 사람에게는 모르게 다음과 같이 일러 주었다.
"여기서 서울까지는 30리라더라, 나는 길을 모르지만 아버지가 내일 서울에 갈 터이니까 그 뒤를 따라서 자취를 잃어 버리지 않도록 해라. 그러면 나는 또 네 뒤를 따라 갈 터이니."

그리고 그 날 밤에 떠날 준비를 하고 헌 옷을 입고 입었던 옷을 개어서 옆구리에 끼고 몰래 집을 빠져 나갔다.

이영희는 숲이 우거진 산 가운데로 뚫고 들어가 몸에 몇군데 상처를 낸 뒤에 옷에 피칠을 하고 찢어서 여기저기 흩어놓고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이른 새벽에 아버지는 서울을 향하여 길을 떠났고 하인과 이영희는 계획대로 그의 뒤를 따라 서울에 이르러서 고모 이매임(데레사)의 집으로 갔다.

고모는 조카딸이 남루한 옷을 입은 것을 보고 크나큰 불행을 당한 것이나 아닌가 하여, "아이쿠, 그게 무슨 꼴이냐? 무슨 불행이 생겼니?" 하며 부르짖었다.
"쉬! 가만히 계셔요! 다 이야기를 해들리테니 아무 말씀도 마세요."
이영희는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자초지종을 죽 이야기하였다.
이야기를 겨우 끝냈을 즈음 아버지가 왔다고 하여 그는 빨리 옆방으로 가서 숨었다.

그동안 본 집에서 딸의 생일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던 어머니는 영희가 보이지 않으므로 놀라서 불러보다 대답이 없고 제 방에가 보아도 없으며 사방으로 찾아다녀도 종적이 묘연하였다.

어머니는 딸이 이상하게 자취를 감춘데 대하여 극도의 불안에사로잡히었다. 삼촌 한 사람이 이 소식을 듣고 숲속으로 들어가보니 피흔적이 있고 그것을 따라가니 조카딸의 옷이 찢어져 흩어져 있었다.  그는 당장 서울사는 이매임의 집으로 달려와 남매가 대화하고 있는 곳으로 뛰어들어가 별안간,
"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어요. 영희가 범에게 잡혀 갔습니다"하고 말하였다.
"내 딸이!"하고 아버지는 부르짖으며 기절하여 넘어졌다.
사람들은 그를 깨어나게 한다, 운다 큰소리를 지른다 하며 야단이었다. 자기 혼자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매임도 오라비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었다.

아버지는 사냥꾼들을 풀어 산림을 샅샅이 뒤져 보게 하였으나 범은 찾아낼 길이 없었다.
처녀의 생사를 알지 못하고 지내는 것도 어언 석 달이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 딸이 행방을 감춘 비밀을 알게 되어 그때 부터 덜 슬퍼하는 것같이 보였다. 아버지는 눈치를 채고 딸이 죽지는 않았나 보다고 생각하고 어느 날 아내에게 말하였다.

"얼마 전부터 당신은 근심이 덜한 것 같으니 바른대로 말해 보시오. 그 애가 아직 살아 있지? 모든 것을 토설해주요. 이제부터는 그 애 뜻을 거스리지 않기로 단단히 약속할 터이니." 이에 이르러 아내가 사실대로 말하여 주자 그는 곧 동생 매임의 집으로 달려가 딸이 무사히 있는 것을 보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네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을 보기만 해도 그만이다. 이제부터는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네가 결혼 않겠다는데 더는 반대하지 않으마." 하고 말하며 딸이 고모집에 머물러 자유로이 신심생활을 하는 것까지도 허락하였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 이영희 고모는 친정인 시흥 봉천으로 이사하여 올케 허계임과 같이 산 것같고 영희만이 서울에 남아 심신생활 수계한 것 같다.

어쨌든 서울의 교우집을 전전하다가, '하다리'에 조그마한 집한채를 마련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어떤 증인의 말에 의하며 유파치피코 신부가 이 집을 사주었다고 한다. 하여간 영희는 여기에서 실을 만들어 팔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결혼했던 언니 정희 바르바라도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후 동생한테 와서 서로 의지하여 살게 되어 그들의 빈곤한 살림이란 이루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또한 봉천의 모친도 판공때가 되면 늘 고모와 함께 서울에 와서 판공성사를 보고서는 달의 집에 와서 묵어 가곤 하였다.

때마침 큰 박해가 일어나, 하루는 영희와 매임, 그외 두 여교우가 교회박해와 순교자의 용맹, 천국의 부활등을 이야기하다가 거룩한 열정이 분발하여 포청에 자수해서 신앙을 증거하고자 결정하였다  갈바리아산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이래 사람의 가슴에 가장 치열하고 가장 순결한 불꽃을 일으키는 것은 언제나 십자가의 나무였던 만큼, 이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때를 같이하여 어머니가 상경하여 용감한 이 여인들은 4월 11일 포장에게 자수하였다.
자수경위와 포총신문과 혹형은 모두 고모 이매임과 같으니 생각하겠다. 10일간 구류끝에 형조로 이송되어 세번의 형문을 거쳐 사형이
선고되었다. 마침 1839년 7월 20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치명하니 그의 나이  31세였다.

이영희 막달레나의 올케 선 막달레나는 자기의 남편을 시켜 허매임, 이정희, 이영희 3모녀의 시체를 거두어 자기집 뒤 가족묘지(오늘의 봉천동)에 매장케 하였고, 동시에 후에 순교한 최 필립보가 그들의 성명을 적어 후세에 길이 남기고자 사발에 그들의 성본명을 적어 같이 묻었다.

3모녀의 유해는 오늘날 절두산 지하 성당에 나란히 안장되어있고 쓰던 사발은 기념관에 전시되고 그 씌어진 글씨는 오늘도 선명하여 순례자들의 신심과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