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이소사(아가다 1783-1839)
이 아가다는 이호영(베드로)의 누님이다. 남매는 원래 경기도 이
천 땅 '구월'에서 태어나서 부모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서울로 이사했다. 어머니의 종교적 무관심 때문에 결국 아가다는 외인에게 출가했다. 그때 나이 17세였다. 그러나 아이를 하나도 낳지 못한 채 3년만에 남편을 여의고
말았다. 남편을 잃은 아가다는 친정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동생과
같이 살았다. 부친이 남긴 조그마한 가산마저 탕진하게 되니, 늙은
어머니와 어린 동생을 데리고 살아가자니 고생이 여간 아니었다.
현석문이 쓴 기해일기에도 "그 때 겪은 바 당시의 고통을 어찌 말
하리로" 이렇게 실로 당시의 고생이 이루 형언키 어려웠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 아가다는 이와같이 평생을 가난한 함께 했을지라도
언제나 안색이 화평하고 조금도 걱정하는 빛이 없었다. 뿐더러 이
아가다의 사람됨이 겸손하고 정중하였으므로 모두가 그이 아름다운 행실을 기리고 그를 사랑하였고 사모하였다.
이 아가다는 삯바느질로 집안살림을 겨우 연명시켜 나갔다. 그러나 남매는 이같이 가혹한 가난을 참아받으며 열심히 수계하였다. 그래서 그때의 교우들이 이 남매의 덕행과 착한 표양을 늘 얘기하고 칭찬해 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아가다의 집이 포졸들에게 기습을 당한 것은 을미년(1835년)음력으로 정월이었고, 그때 그의 집은 한강변 '무쇠막'이라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때 남매는 포졸의 기습이 있으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 따라서 잡히는 순간에도 피신은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이 때 이호영은 외출해서 돌아오다가 문간에서 대기중인 포졸에게
잡히고, 이어서 아가다도 잡혔다.
이 광경을 본 어머니는 그자리에서 까무러쳤다. 아내도 잡으려는 포졸들을 향하여 이 베드로가 "이 사람은 죄가 없으니 내버려
두시오. 죄가 있는 것은 우리뿐입니다"고 하며 아내만은 놓아 주어 어린 것과 노모를 돌보게 해 달라고 간청하니, 마침 이웃에 사는
포졸이 감격하여 그의 아내를 놓아 주고 남매만 붙잡아 갔다.
포청에 압송되어 포장이 "너희들이 천주학을 한다는 말이 옳으냐?" 고 묻는 말에 남매는 한 가지로 "네 그렇습니다"하고 대답하
였다. "배교하고 일당이 있는 곳을 대라" 하자, 두 남매는 "천주는
우리의 대군대부 이시라 우리는 배주하지 못하겠고 또한 일당을
대면 말로써 남을 살해함이 되므로 할 수 없습니다"고 대답하자
형리를 시켜 주리를 틀게 하였다.
먼저 동생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누이는 격려했다. 격려하는
말을 듣고 형리들이 아가다를 "고약한 계집 같으니! 동생을 참회시키기는 커녕 도리어 격려를 하다니!" 하고 모욕하면서 매질하기 시작하였다. 의식을 회복하자 베드로는 "누님, 왜 그런 말을 해서 그런 욕을 당하십니까?"하고 누님을 위로하였다.
첫번 문초 때부터 이 아가다는 매를 몹시 맞고 주리를 틀렸다.
포장은 이 아가다가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결심을
꺾이지 않는 것을 보고 그녀를 형리에게 맡겼다. 이 아가다를 옥
에서 끌어내어 무수히 난타하고 형리들은 흰 바지나 혹은 검은 바지에 검은 빛이나 남빛 저고리를 입고 굵기가 팔뚝만하고 길이 8척가량 되는 붉은 몽둥이를 들고 있었는데 아가다를 붙잡아 옷을
벗긴 후 팔을 잡아 메달아 놓고 매질을 혹독히 가하였다. 아가다의 온몸은 유혈이 낭자하였으나 그의 용기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
다.
이 베드로는 1835년 11월 20일자(음력)로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에 자기와 누이가 받은 문초와 고문상황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이 편지는 불행히도 오늘에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그 일부가 다행히 모방 신부가 파리 본부에 보낸 편지에 남아 있다. 이 편지에
의하면 남매는 1835년 음력 11월 6일 법정으로 끌려가서 문초를
받았다. 베드로는 누이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하였다. "누님도 문초를 받았는데 나와 같이 진리를 증거하였다"
<이어 재판관은 우리들을 몹시 매질하라고 하였습니다. 형리들이
매질을 멈추었으나, 누님은 기운이 핍진하고 무거운 칼 밑에 몸이
움츠러들어서도 항상 순교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천주께 순교할 은혜를 주실 것과 도움심을 구하여 마지 않았습니댜.>
결국 남매는 형조로 이송되었다. 이 때 허태복이란 새우젓 장사를 하는 교우가 자주 감옥에 드나들며 남매의 심부름도 하였으므로 감옥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알 수가 있었다. 남매는 수많은 혹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굴복한 적이 없고 언제난 태연한 기색으로 조금도 낙담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옥에 있은지 4년 동안 아가다의 착한 표양에 감동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옥졸까지도 성교 도리가 과연 아름답다고 칭송했다. 4
년이란 긴 세월의 옥중생활 동안 겪은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 형장을 향해 수레에 올랐을 때도 이 아가다의 안색은 여전히 평온하였고 형장에 이르러 수레에서 내리자 성호를 긋고 나서 침착한 자세로 칼을 받고 위주치명하니 그의 나이 5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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