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이광렬 (요한 1794-1839)
기해년 음력 3월 5일에 이른바 사학퇴지령의 공포와 함께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맨처음으로 남교우 3명과 여교우 6며이
5월 24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치명당했다. 그 후 박해는 뜻밖에
주춤하였고 이렇게 한때 중단된 시기를 이용하여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려고 상경했던 앵베르 주교도 수원으로 안전하게 피신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돌연 음력 5월 27일 그간 포졸들이 정찰에
태만하였음을 책하고 앞으로 철저한 수색을 통해 중형으로 대처한다고 위협하는 새로운 훈령이 나왔다.
때를 같이하 유다스 김여삼의 상세하고도 정확한 정보제공에 힙입어 유진길, 조신철, 정하상 같은 교회의 주요 인물들이 속속
검거되었다. 날로 강경해가는 정부의 대 천주교 조치는 드디어 7월 20일 다시금 사형집행을 재가 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8명의
교우가 참수치명하니 이광렬(요한)은 그중의 한분이었다. 이 용감한 대열의 우두머리인 이 요한은 이광헌 회장의 동생이며 이 아가다의 삼촌이시다.
이 요한은 형과 함께 참수될 것이었지만 원래 우리나라 법에 형제를 함께 죽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그의 사형이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광렬은 관변측 기록에 나오는 이름이고 교회측 기록인 기해일기에는 그의 이름이 경삼으로 되어 있다. 경기도 광주 이씨의 양반가문에 속해 있었고 신앙면에서 4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이광헌 회장 집안의 한 사람이었다. 본시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가 천주교를 믿게 된 것은 중년에 이르러서이고
형의 입교가 그 계기가 되었다. 그때까지 광렬(요한)은 총각이었다고 하는데 아마 형이 몹시 가난하게 살았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 아가다는 이 집이 얼마나 가난한지 이렇게 말한다. "나는 10여세에 가끔 외조모를 따라 이 회장 집에 갔었다. 이 집 식구들은 아주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 어려움을 잘 참았다. 세상 것을
생각지 않고 늘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우리 집에서 두부장사를 하고 있었으므로 외조모는 나를 시켜 비지를 갖다주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교우들은 거처할 곳 없는 처지를 가련히
여겨 추렴하여 서소문 밖 고마창골에 기와집 한 채를 마련하여
공소로 사용하고 형 이 광헌이 거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광렬은
형과 같이 거처하지 않고 형의 집에서 멀지 않은 이뭇골의 조그마한 초가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따로 살았다. 그리고 김 안나라는 여교우와 같이 분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러면서도 교우의 본분을 잃지 않고 다했으므로 모두 교우들이 그의 착한 표양과 덕행을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 그는 아주
강직하고 열성있고 열심이 깊어서 입교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
회장들한테 인정되어 북경으로 가는 사신들과 동행하였고, 또 거기서 교회 일을 보는 데 참여하였다. 이 임무를 수행한 후 북경
신부들로부터 세례와 기타 성사를 받았다. 그러므로 수년간 북경을 왕래하며 선교사를 맞아들이는 중책을 맡아 보는 지도층 교우틈에 끼게 되었다. 그는 두 차례나 북경을 왕래하였고 북경의 수사와 신부들은 이 요한의 충직한 모양과 일심의 간절함으로 보고
경탄하였다고 한다.
이 요한이 북경에서 성사를 받고 돌아온 후에는 종전보다 열심이 배가 되어 육식을 일절 하지 않았고, 또한 결혼할 생각을 단념하고 세상의 모든 희망과 쾌락을 버리고 독신으로 지낼 결심을하게 되었다.
특히 묵상과 관상을 통한 이 요한의 정신수렴은 비상한 것이어서 주님과 끊임없는 결합을 누구도 방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외형
에서도 드러나 과연 이 요한에게서 성사의 특별하고 신기한 효험을 능히 체험할 수 있었으며 성령을 충만히 받은 자라고 사람마다 탄복했다는 것이다.
1839년 4월 7일 포졸들이 한밤중에 갑자기 쳐들어와 형을 비롯 온집안 사람이 체포되었으니 어머니를 모시고 있던 이 요한도
어머니와 같이 잡혔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항시 순교할 원의를 품고 있던 그에게는 절호의 기회였을 것이다.형과 한가지로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형과 한가지로 굳세게 머물렀다. 포장은
먼저 형을 향하여 "한마디 배교한다는 말만 한다면 너 뿐 아니라
네 처와 동생과 자녀를 다 놓아주겠다. 또 네 가산도 다 돌려주겠다"고 달려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다음 동생 요한에게로 와서 여러 차례 주리와 곤장으로 배교하 라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조금도 굴복함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며 언제까지라도 그것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단언하였다. 사형선고를 받고서도 오랫동안 옥중에서
고생하다가 1839년 7월 20일 초여름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치명하니 그이 나이 4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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