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이간난(아가타 1813-1846)
이간난 아가타는 1813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이간난의 동생 엘리사벳은 언니가 열여덟살 적에 시집갔는데 부모가 외인이었던
관계로 외교인에게 출가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시집간 지 불과 2년만에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천주교인이던 외할머니가 손녀에게 에수 마리아를 부르게 하였다. 이 말에 놀라 비로소 천주교를 알아보려 하였으나 아는 교우가 전혀 없어서 어머니에게 교우를 소개해줄 것을 간청하였다.
다행히 어머니의 친척 가운데 한 바울라라는 교우가 있어서 이간난은 그 집을 찾아가 교리를 열심히 배우고 개종하였다. 영세준비를 하고 유방제 신부에게 아가다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하였다.
곧 어머니와 오라버니도 입교하였다. 성품이 곧고 근면하였으므로 교회본분도 충분히 이해하였다.
종교서적을 부지런히 읽은 한편 희생과 극기를 많이 하였으며 특히 대재를 자주 지키었다. 남들이 재혼을 권했으나 이미 절개를
지키기로 결심하고 청혼을 거절하였다. 이 간난이의 언행이 매우
정결하고 단정해서 교우들은 "이간난 아가다는 얼음처럼 맑고 설화석고처럼 희다"고 경탄해 마지 않았다.
집안 사람들이 천주교를 믿는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화가 난 간난이의 아버지는 그들이 수계하지 못하게 전력을 다해 방해하기
시작하였으나 그럴수록 그들은 더욱 열심히 믿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내와 아들을 멀리 경상도로 쫓아내는 동시에 딸 간난이도
이미 죽은 남편집으로 돌려보냈다.
시집으로 돌아온 후로 이간난은 시누이들을 설득하여 마침내 그 들을 입교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시집에서도 자유롭게 수계할 수없어서 길쌈으로 돈을 푼푼이 모아 결국 서울 잣골에 집 한채를
사고 따로 살게 되었다.
그리고 교우집으로 떠돌아 다니는 우수산나를 오게하여 친형제 처럼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살았다. 1846년 7월 10일에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잠시 숨어 있다가 다시 나와 지나가는 길에 현석문
가롤로 회장 집에 들렀는데 그만 그날밤에 포졸들에게 들키어 붙잡히게 되었다. 이 간난 아가다는 얼굴빛도 변하지 않은 채 말하였다. "우선 내 집으로 가서 옷가지를 가지고 떠납시다"라고, 그가
당한 신문과 고문은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는 한동안 배교의 유혹을 받아 형벌중에 솔직한 대답을 하지 않기 시작하였으나, 신자 두명의 권면이 그의 용기를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이간난이의 고통과 아픔은 모든 순교자들이 기꺼이 받아
들이는 고통이요 아픔이었다. 1846년 9월 20일 옥에서 교살되어
처형되닌 그의 나이 3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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