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1791 - 1839)(49세) 역관(譯官), 학자 9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
성 아우구스띠노 유진길(劉進吉)은 소년 성인 유대철의 아버지로서, 서울의 유명한 역관(譯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특히 철학적, 종교적 사색을 즐겨하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그를 '만권의 책과 동서고금의 학문이 가슴에 가득한 인물'이라고 일컬었다. 이처럼 진리를 향한 정신적인 갈망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던 그는 우 연히 자기집 세간에 발려 있는 헌 종이에 영혼, 각혼, 생혼이라는 글자를 보고 그 내용이 '천주실의'라는 책의 일부분임을 알고, 사방에 수소문한 끝에 한 교우를 만나게 되어 교리를 터득한 후 곧 입교했다. 그 후,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던 정하상을 만나게 되었으며, 역관의 신분을 이용하여 북경교회와 연락하면서 자신도 성직자 영입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824년 동지사(冬至使)의 수석 역관으로 북경에 가서 성세성사를 받고 북경교회의 연락을 담당, 1826년 교황에게 성직자 파견을 간청하는 편지를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는 등 전후 8회에 걸쳐 북경을 왕래하면서 조선교회의 상황을 북경에 알렸다. 그 결과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었고, 1833년 중국인 유방제 신부, 그 뒤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와 앵베를 주교가 입국하게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박해 초에는 정3풍 당상역관(堂上譯官)이라는 높은 지위와 권세가와의 친분으로 체포되지 않았으나 7월 17일에 체포되어 갖은 혹형과 고문을 받았다.
서양 신부가 숨어있는 곳을 대라는 요구에, 박식한 그는 교리설명과 함께 그들의 요구에는 함구하면서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주리형과 줄톱질형을 받는 형벌에서도 의연한 자세를 지켜 믿음의 위대함을 보여주었고, 국법을 어겨 매국노와 공모한 사학의 무리라는 죄목으로 1839년 9월 22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모든 진리의 근원이신 전지하신 주님의 품에 안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