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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유정률 베드로   

 

 

 

 

 

 

    

 

성인 성 유정률 베드로 

영문명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66.2.17 순교 
신분 회장  지역 한국 


성 유정률 (베드로 1836-1866)


유정률 베드로는 평양지방의 윤리면 답현리(일명 논재골)에서1836년에 태어났으나 어려서 일찍 고아가 되어 호구지책으로 하는수 없이 짚신을 삼아 생계를 이어 가고 있었다.

원래 성격이 성급했던 그는 자기 아내가 고집을 부리지 않고 대들면 참다 못해 흔히 부부싸움을 하고 또 다투다 보면 아내를 때리거나 노름판으로 달려가곤 하였다. 1863년과 1864년 사이에 하루는 그가 집에 들어서면서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 일이 있은 이래 유정률은 이웃에 사는 정태현 빈체시오와 함께 성교공부를 한 후 1864년 베르뇌 주교한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부터 그의 생활이 근본적을로 바꾸어지게 되었다. 그는 우선 노름에서 손을 완전히 끊고 어떠한 난폭한 행위도전혀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참을성 많고 상냥한 사람으로 변하였다.

아내를 때리는 버릇을 고치기 위해 자기몸을 채찍질하곤 하였는데 때로는피를 흘려 가면서 자문자답하기를 "너 아프지? 네가 아프면 네가 때른 남도 아플 것이 아니겠는가"하였다. 옆에 있는 부인도 달라진 남편을 보고 감화를 받아 고집이 센 자기 기질을 차츰 죽여 감으로써 마침내 그도 착하고 친절한 아내가 되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시작한 유정률은 점차 마음속에 신앙의 열이 더해짐에 따라 많은 이들을 성교회에 입교시키었다.

1866년 초 천주교들에 대한 박해가 터질 것이라는 소문이 유정률 주위에 나돌고 있었다. 유베드로 자신도 내심 어떤 큰 일이나고 말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지만 다 큰 아들 앞에서도 아무일도없는 양 태연하게 살아갔다. 음력 정초가 되어 그는 친척집에 찾아 다니면서 인사겸 "평안히들 계십시오. 우리는 서로 멀리 떨어져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가면 언제 다시 만나 뵐지 모르겠습니다."하며 인사말을 하였다.

바로 이 날 땅거미가 짙어질 무렵 유정률은 고둔이라는 마을로 가있었다. 이곳에는 정 빈첸시오 회장이 살고 있었으며 공소 강당이 있어 교우들이 모여 함께 신공을 하고 복음을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밖에서 개들이 요란하게 짖는 소리가 들렸다.

교우 하나가 밖에 나갔다가 되돌아 와 하는 말이 5-6명의 낯선 삼들이 집주인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포졸들이 방문을 박차고 들어서며 "감사님이 너희들을 보고자 하신다" 고 집주인 정태현 회장을 노려 보고 말하였다. 때가 마침 정초였기 때문에 설날을 위해 준비했던 음식을 포졸들에게 차려 주고 술을 따라 주었다. 이들이 술에 취하고 기분이 좋아지자, 이 기회를 타 많은 신자들이 피하게 되고 결국 남은 사람은 정회장과 그의 조카 그리고 유정률, 우 알렉시오와 다른 4명뿐이었다.

다음날 포졸들은 이들만을 잡아 결박하지도 않고 데리고 길을 떠났다. 먼 길을 가는 동안 유정률은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주 예수께서 우리르 불러 주셨도다"라고 하며서 마냥 기뻐했다. 평양 감영에 도달하자 문초도 하지 않고 이들을 즉시 감옥에 가두었다.

몇시간이 지난 후 평양감사 정지용을 위시한 남정 군졸 등 약 200명 이상이 버티고 있는 단상앞에 불려 나가서도 이들 모두는 한결같이 목숨을 걸고 묵묵히 대기하고 있었다.

이윽고 천주교 신봉여하에 대하여 문초가 시작되자 신자들은 한 마음 한뜻이 되어 신앙을 고백하면서 끝내 사수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러다가 심한 곤장이 수차례 계속 되어 4명이 배교하여 풀려 나가고 정빈첸시오 회장과 유정률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정회장도 친구들과 배교자들을 따라가니 결국 유정률만이 혼자남게 되었다.

그래서 감사는 이에 배교한 자를 다시 불러드리라고 명령하여 이들에게 몽둥이를 주면서 회장이며 동료인 유정률에 곤장을 치게 하였다. 이것을 거절하자 군졸들이 마구 때리면서 강제로 명령을 따르게 하였다.

강박만으로는 도저히 잘 되지 않을 것을 알고 다시 포졸들에게 유정률을 때리겠다고 할 때까지 배교자들에게 곤장을 치게 하였 다. 거기에 있던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강요하여 유정률은 자기를 때리는 동료들에게 "살이 살을 잡아 먹는구나"하고 말하면서 정신을 잃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성인 우세영 알렉시오도 한패가 되어 유정률을 쳐서 죽이니 이같은 불상사가 또 어디 있으랴! 이때에 옥에 갇혀 있는 100여명 교우에게 한사람이 세대씩 치라고 명하였다. 그가 무려 300여대를 맞고 순교하니 때는 잡혀 간 바로 다음날인 1866년 2월 17일이며 장소는 갈매못이었고 그의 나이 30세였다. 아직 본격저인 대박해 가 시작되지 않을 때였다.

포졸들이 죽었다고 보고하자 감사는 "다시 코에 심지를 박고 불을 켜 대라"고 명령하였다. 불이 타들어가도 유정률 베드로가 전혀 움직이지 않자 그때서야 감사는 5명의 배교자들에게 명하여 그의 시체를 강에 던지게 하였다.

이들은 시체를 메고 오륙노라는 곳까지 가서 대동감에 던지게 하였다. 유정률의 아내는 관장에게 돈을 주고 시체를 사서 사공인 사돈을 시켜 시체를 건져 논재골 선산에 묻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유정률 베드로가 순교한 자리에서 환한 빛이 번쩍였고 가라앉지도 않고 그 자리에 둥둥 떠 있었다고 말하였다.

그 후 10년이 지난 1876년 관헌의 명령으로 그 강변에 쑥돌을 갈아 한문으로 글을 새겨 비석을 세웠다. 이 것이 바로 평양감사 가 사교의 선동자들을 반대하고 억압한 행적을 칭찬하여 세운 기념비였다.

우리는 바로 이 비석에서 유정률 베드로 성인의 영웅적인 죽음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도 평양 부벽루 옆에 있는 영명사에 그대로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