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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김 데레사 

 

 

 

 

 

 

    

 

성녀 김 데레사(1796-1840)

 


김 데레사는 김대건 신부의 당고모가 된다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다 순교하였다. 아버지는 순조15년 을해박해(1815)시 안동에서 잡혀 이듬해 대구에서 참수치명한 김종한(안드레아)이다. 그의 고향은 바로 김대건신부의 고향이기도 한 면천의 솔뫼였다.

본시 부모가 열심한 교우였으므로 김 데레사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교육을 잘 듣고 자신도 열심히 봉교하였다. 어머니를 여의게 되자 집안이 가난해서 이때 외가에 붙어 자랐다.

원래 수절할 뜻은 있었으나, 아버지가 결혼하기를 명하므로 단안하고 본성이 착실하며 자선심이 많은 처녀로 열 일곱살 때에 해미 감옥에서 신앙을 위하여 죽은 손 연옥(요셉)에게 출가하여 여러자녀를 낳아 모두 천주님을 경외하도록 교육하였으며 서른 두 살 때에 미망인이 되어 그때부터는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대제를 지키기까지 고행에 전심하였으니 김 데레사야말로 어진 아내와 교우다운 미망인의모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살림살이가 비천하고 가난하였지만, 수절하며 정결한 덕행으로 모든 교우의 모범이 되고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매일 같이 겪어야 했던 궁핍 생활에 불평하지 않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며 자신의 허물을 간절히 뉘우쳤다.

남편이 죽은 뒤에 얼마동안 서울 친척집에 와 있다가 다시 시골 계모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때마침 중국에서 유신부가 입국하게 되자 신부댁에서 시중을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교우들이 김 데레사를 적임자로 추천하게 되었다.

그래서 서울로 불려 와 정 엘리사벳과 같이 신부댁 살림을 돌보게 되었다. 김데레사는 이 비천한 종살이가 자기 신분에 저촉됨을 조금도 꺼려하지 않을 뿐더러 겸손하게 또즐거이 맡은 바 소임을 다하니 모두가 그의 겸손에 탄복해마지 않았고 유신부 자신도 김데레사를 칭찬하였다. 유신부가 떠난 뒤에도 김 데레사는 정 엘리사벳을 따라 주교댁에와서 시중들고 있었다.

김 데레사는 본디 치명할 원의가 간절했다. 그래서 박해가 일어나자 시골로 쉽게 피신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정 엘리사벳과 같이 치명하고자 피신하기를 거절하고 체포를 기다렸다.

소원대로 1839년 7월 9일 정하상 일가와 함께 붙잡혔다.문초 때마다 대장 50대씩 치며 "배교하라, 일당을 대라, 신부에 관한 사정을 말해라"하며 엄명했다.

이렇듯 여섯번 문초에서 총 280도의 대장을 맞았다. 그러나 김 데레사는 인내와 용기로 이 모든 혹형을 극복하고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재옥 일곱 달 후 마침내 교수형을 선교 받았다. 형리들이옥안으로 들어 와 김 데레사를 끌어내어 특별한 옥으로 데려가서 그의 목에 끈을 감고 양쪽으로 오랫동안 잡아 당기었다. 그리고 끈 양쪽끝을 말뚝에 단단히 감아 놓았다.

자신의 순교를 완성하니, 때는 1840년 1월 9일이며 그의나이 44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