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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유소사 체칠리아    

 

 

 

 

 

 

    

 

성인 성녀 유소사 체칠리아 

영문명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39.11.23 순교 
신분 과부  지역 한국 


성녀 유소사 (세실리아, 1760-1839)


유소사 세실리아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스무살 되었을 때 경기도 양근 지방 마재에서 사는 정약종의 후실로 들어갔다.
정약종은 명도회의 첫 회장이며, 교회 초창기의 열심한 교우의 하나였던 만큼 남편의 권고로 출가온 지 불과 삼년 만 에 입교하여 남편과 한가지로 열심 수계한 것을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1800년 양근지방에 박해가 일어나자 유소사는 남편을 딸 서울로 피신해 왔다. 이때 어린 자녀와 함께 주문모 신부로 부터 영세를 받았다.  다음해 신유년 서울에서 큰 박해가 일어나서 이 박해로 남편과 전실의 아들 철상이 순교하였다.
이 때 유소사도 잡히어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옥에 갇혔다가 얼마후 석방은 되었지만 이미 가산은 몰수되어 의지할 곳이 없었다.

유소사는 큰 딸과 일곱살의 하상, 다섯 살의 정혜(엘리사벳) 이렇게 어린 삼남매외에도 전실의 자부와 그 아들 등 모두 5명의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것들을 돌보아야할 막중 한 책임이 있었다.  친척들은 한결같이 죽음이 두려워서 그들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친구가 그들을 마재로 데리고 와 정약전, 정약용 시숙들에게 붙어 살게 하였다.
시숙들은 차마 그들을 내쫓지는 못했으나 그들을 도우려 하지도 않았으므로 이때부터 유소사에게는 빈궁과 시련의 날이 시작됐다.

얼마 안되어 12세의 큰 딸과 자부와 조카를 잃게되니, 오직 세실리아는 슬하의 남매를 키우는 것을 낙으로 삼고, 의지하며 지내던 중, 아들마저 부득히 교회일로 서울에 가게 되었다. 모녀는 주님의 안배에 전 소망을 걸고 빈궁을 참아 냈으니, 그 사이 모녀가 겪은 고통을 어찌다 형언할 수 있을 것인가.

어느날 밤, 세실리아는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남편 정약 종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나는 천국에서 방이 여덟이 있는 집을 하나 지었는데 다섯은 벌써 차고 셋만 남았소. 그러니 생활의 곤궁함을 잘 참 아 받으시오. 그리고 꼭 우리를 만나러 오도록 하시오."
과연 그들의 가족은 여덟 식구에서 다섯이 죽었다. 이 꿈 은 나중에 꼭 들어맞았지만 그때 소사의 가슴에 깊은 신앙 을 박아주고 그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의 아들 하상은 선교사들을 조선에 잠입케 하려는 중대 한 계획에 전심하여 여러해 동안 어머니와 떨어져 살았다.
이것이 소사에게는 너무나 외로운 시련이었으니, 아들이 북경으로 길을 떠날 때마다, 이것이 그대로 마지막 이별이 되지나 않을까 하여 소사의 가슴은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 지는 것 같았다.
북경을 왕래하던 중 한번은 북경주교가 하상에게 집안소식을 묻더니 노모와 누이동생을 외교지방에 홀로 버려둠이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귀국하자 주교의 분부대로 어머니와 누이를 서울로 몰래 모셔와 같이 살았다. 소사는 아들과 다시 같이 살게된 것을 천주께 감사드리며 그의 열심을 배가하였다.

그 후에도 아들은 여러번 북경길을 떠나야했다. 6-7개월 동안 후에 아들을 다시 보려는 희망에서 모든 것을 주 성모님께 의지하고 떠날 때부터 열심히 기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소사 일가는 서울에서 다시 충청도로 이사했다. 수계하는데 좀 자유롭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6-7년만에 서울로 되돌아왔는데 아마도 1827년 이 지방에 있었던 박해를 피해서 온 것같다.

신부와 주교가 잇달아 들어오고 아들이 주교를 모시게 되닌 소사는 주교와 같은 집에서 사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제 칠순의 고령인지라, 직접 주교님에게 시중들지는 못했으나 그 대신 날마다 닭이 울면 일어나서 미사에 열심히 참례했다.
또한 성사를 착실히 보고 대제를 지켰으며, 애인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으례 자기차지의 밥을 주는 것이었다.

기해년 2월 박해가 치성해지자 하루는 조카가 와서 시골로 피신하기를 원했으나, 소사는 "나는 늘 치명하기가 소원이었다. 이제 그 기회가 왔으니 아들과 함께 치명하련다."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주교마저 피신한 뒤 모녀는 날마다. 시간마다 포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아들도 주교를 피신시켜 드리고 돌아왔다. 드디어 7월 19일 허다한 포졸이 달려들어 거기있던 소사와 하상(바오로)과 정혜(엘리사벳), 남매, 하인 김데레사 5명을 다체포하여 포장에게 대령시켰다.

포장이 소사를 향하여,
"네가 천주학을 한다는 말이 사실이냐?" 하고 물었다.
"과연 사실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포장은,
"배교하고 일당을 대라."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배교는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저와 같이 아주 나이가 많은 늙은이가 무슨 분별이 있어서 사람들을 알 리가 있겠습니까? 사실 아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포장은 세실리아를 옥에 가두게 했다.
79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국사범과 같이 오라를 지었다. 그것은 그의 집안내력 때무이기도 하지만 아들이 외국인과 상종한 데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후에도 소사는 다섯번의 문초를 받았고 문초 때마다 50도의 매를 맞음으로써 도합 230도의 매를 맞았으나 그의 마음은 한없이 태연하기만 했다.

소사는 칼 아래 순교하기가 실로 소원이었다.
그래서 오주예수의 수고수난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그 무한한 은혜에 감격해 마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법이 미성년은 물론이요, 노인인 경우에도 목을 베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소사는 옥에 갇혀 있는 5개월 동안 열두 차례의 문초와 동시에 무거운 형법을 받음으로써, 마침내 그의 기력이 쇠퇴하여 옥에서 선종하니 그의 나이 79세요, 때는 1939년 11 월 23일이었다.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예수 마리아의 성명을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다.
소사는 실로 삼남매의 순교자를 낳은 가장 훌륭한 순교자의 한 분인 정약종의 배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