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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위앵 루가    

 

 

 

 

 

 

    

 

성인 성 위앵 루가 

영문명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66.3.30 순교 
신분 신부  지역 한국 


성 위앵(루가 1836-1866)


한국 성 민씨인 마르티노 루가 위앵은 1836년 10월 20일 랑그르 교구의 기용벨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포도밭을 경영하는 매우 화목한 집안으로 이미 자녀 여덟을 둔 아이부자였고 루가는 아홉째로 막내였다. 또한 일에 대한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훌륭한 천주교 집안의 유산도 이어받고 있었다.

1864년 6월 13일 그는 조선으로 떠나게 된 것이다 <조선 만세! 제가 곧 일생을 바쳐 일하러 갈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그리고 만일 천주님께서 원하시면 제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피를 흘릴 수 있을 곳도 바로 여기입니다.>

그 이튿날 이내 그는 그의 기쁨을 부모님과 나누고자 했다.
<제가 선교사 대열에 끼이는 것을 거절하지 않으신 천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그리고 자상하신 어머니, 오늘 저는 두분을 생각하고 또 두분께서 오래 전부터 희생하셨음을 알고 있기에 제 기쁨을 같이 하시라고 이렇게 서둘러 이 훌륭한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두분께서는 어쩌면 순교자가 될지도 모르는 선교사가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신 것으로 인해서 하늘나라에서 두분을 기다리고 있는 영광을 저를 두분곁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받으셨을 지극히 빨리 지나가고 마는 만족과 바꾸시기를 원하시겠습니까?>

1864년 7월 15일 다른 선교사 아홉명과 함께 파리를 떠난 위앵 신부는 브르트니에르, 도리 신부들과 더불어 길고도 파란 곡절이 많은 여행을 했는데 그 여행은 1865년 5월 27일 내포지방에서 다블뤼 주교를 만남으로써 끝이 났다.

위앵 신부는 6월 18일 성체축일까지 다블뤼 주교와 함께 있었다. 그런 다음 주교가 계신 곳에서 십리 떨어진 황무실 교우촌으로 갔다. 위앵 신부는 그때의 감동을 이렇게 적었다.
<이것이 제 성체거동이었습니다. 그때에 나는 유럽에서 당신네의 그 화려한 예절에 참석한 것보다도 더 기뻤습니다.>

어느 회장을 따라 걸어가면서 그는 성체 찬양가를 흥얼거렸다.
이후로 그는 쾌활에게 조선식 생활을 시작했다. 소금도 기름도 안치고 물로만 익힌 쌀밥을 하루 세끼씩 먹고 땅바닥에 깐 돛자리위 에서 잠을 자고 쪼그리고 앉아서 먹고 일하고 찾아오는 사람을 맞았다.

"이러한 풍습에 익숙해지기는 아주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무엇 때문에 희생이란 말을 하겠습니까? 이것은 내가 죄를 속죄하고 천주님께 조금이나마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내가 스스로 그리고 일부러 선택한 몫이 아닙니까?"하고 그는 말하였다.

조선 사람집에 혼자 있으면서 위앵 신부는 한문공부도 하면서 조선말을 열심히 배웠다.
"이 조선말 공부도 천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면 쉽게 사람을 낙담시킬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천주님을 위해서라고 생각 했기 때문에 낙담이라는 것은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하기는 이러한 노력의 대가로 그의 조선말 실력은 눈에 띄게 진전 해서 1866년 2월 말부터는 교우들의 고백을 듣고 교리를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교우들은 매우 좋아해서, "겉 인상은 그래도 그 분은 우리들에게 자식을 교육할 줄 아는 정말 어머니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선교 일꾼은 풍성한 활동을 시작하려는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천주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
실 참이었고 위앵 신부는 피를 흘림으로써 조선교회를 기름지게 할 참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을 이 선교사는 제2의 고향인 조선을 순교자의 고장으로 생각하고 들어옴으로써 미리 내다 보고 수락했던 것이다. 그러나 또 선교활동을 하는 것도 희망했었다. 참수형을 당하기에 앞서 그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했다.

"내가 이처럼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것과 또 이처럼 비천한 곳에와서 죽는다는 것은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지만 다만 불쌍한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는다는 것은 괴롭습니다."

그가 500명 가량의 고백을 듣고 열다섯 내지 스무명에게 병자의 성사를 주고 몇 차례 혼배강복을 주었는데 그럴즈음 종교박해가 시작되었다.

1866년 2월 25일 다블뤼 주교는 브르트니에르 신부를 통해 베르 뇌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아직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고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만주 교구 교구장 배롤 주교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포졸의 수색이 얼마나 심해졌는지 선교사는 한사람도 남아나지못할 것 같습니다."

다블뤼 주교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와 함께 3월 9일 만났는데 아마 그들에게 어떤 뜻밖의 사태에도 대비할 수 있도록 하라고 일렀을 것이다. 주교는 거더리에 그대로 남아 있고 위앵 신부는 새 거리로 물러갔다.

그러나 포졸들은 이미 마을마다 침입해서 집들을 뒤지기 시작했었다. 3월 11일 다불뤼 주교가 체포되었고 주교는 위앵 신부에게 전갈을 보내 그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했다. 바로 그날 위앵 신부는 오랫동안 고백성사를 준 다음 미사를 드리려고 하고 있는데 교우들은 밤에 떠나라고 재촉했다. 그래서 높은 뫼 마을까지 양반 교우 신 바오로의 집에서 낮시간을 보내고 밤이 되자 그곳에서 20 리 떨어져 있는 쇠재로 가서 거기서 다블뤼 주교의 전갈을 받았다.

포졸들이 상관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어기고 전갈을 가져 오는 사람을 따라왔다. 그들은 위앵 신부를 살펴보고,
"당신이 정말 민신부요.?"
"그렇소, 내가 민신부라는 사람이요."
"조선에 온지 얼마나 되오?"
"작년에 왔소."
"같이 온 사람이 몇이나 되오?"
"여럿이 왔소."
"그 중에 어떤 사람을 본지가 오래되오?"
"요전에 오 신부를 보았소."
"오 신부는 어디 있소?"
"모르오."

위앵 신부는 사슬에 묶여 다블뤼 주교 있는 곳으로 끌려 왔다.
그때가 3월 12일이었다. 같은 날 오메트르 신부도 동료들과 합류했고 그리스도를 위해 붙잡힌 이 세 사람 모두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들은 3월 19일 서울에 도착해서 고약한 그곳 옥에 갇혔다가 3월 20일부터 22일까지 신문과 무서운 고문을 당했다. 극형인 군문효수 사형선고를 받고 그들은 처형장소인 수영 갈매못으로 느릿느릿 끌려갔다.

처형장소에 있었던 한 목격자는 위앵 신부가 처형되기 조금 전에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다블뤼 주교가 목이 반쯤 잘린 채로 비참한 단말마의 고통속에 몸부림치는 것을 보고 있었고 그 자신도 기진맥진해 있었으며 또 조선교회를 위해 그렇게도 일하기를 열망했던 그가 그렇게도 젊은 나이에 인간적으로 끔찍한 죽음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감수성이 특히 예민했던 그는 흥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용기가 꺾이지는 않았다. 그날이 바로 예수 수난 기념일이었는데 스승 예수께서도 그 분의 임종을 고통중에 슬픔과 두려움 그리고 혐오를 맛보지 않으셨던가?
"스승보다 나은 제자가 없다."고는 하였으나 그는 그의 마지막 고난의 언덕을 용감하게 기어올라가 머리를 망나니앞에 내밀었다.
그의 머리는 단칼에 떨어졌다. 때는 1866년 3월 30일 그는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품에 안겼다.

이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