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우세영 (알렉시오 1844-1866)
일명 세필이라고도 불렸던 우세영 알렉시오는 황해도 서흥 고을에서 부유하고 유명한 선비의 세째아들로 태어났는데 이 선비는
자기 아들의 뛰어난 재질에 몹시 충격을 받아 그의 교육을 특별히
돌보았다.
그가 18세가 되었을 때 빛나는 성적으로 진사시험에 급제하게 되었는데 바로 이때 우연히 전교회장 김요한을 만나 처음으로 천주교 이야기를 듣고 감복하여 이를 믿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다시 유경실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곧 아버지에게 세례를 받으러 서울로 떠나겠다고 말씀을 올리었다. 눈물과 꾸지람과 모진 대우를 무릎쓰고 아버지의 집에서 빠져나와 몇몇 다른
예비신자들과 함께 베르뇌 주교의 발아래에 앞드렸다.
거룩한 주교는 그의 정신적인 통찰력과 보통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그의 자질을 인정하였지만 그의 신앙이 가족으로부터
얼마나 무서운 유혹에 직면하게 될 것인지를 예견하고 우선 그를
시험하고자 하였다. 주교는 우세영이 동행인들에게는 모두 세례를
주어 고향으로 돌려보냈으나 그에게는 새로운 사태가 발생할 때까지 세례주기를 거절하였다.
우세영 알렉시오는 슬퍼서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세례를 주교에게 간청하고 자기 가족이 무슨 일을 하든지 천주의 도우심으로 신앙을 굳게 지켜 나가겠노라고 약속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정의배 마르코 회장에게 그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주의깊게 그를 가르치고 관찰하라고 이르고 1주일 후에 정의배의 유리한 증언을 듣고 나서야 우세영에게 알렉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주었다. 때는 1863년이었고 주교는 신입교우들에게 "그대가 천주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마귀를 섬기지 않도록 조심하며 부모님을 그대의 행복에 참여시키도록 힘쓰시오"하고
말하였다.
우세영 알렉시오는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매우 차가운 대접을 받았다. 매일 욕을 먹어야 했고 자주 매를 맞아야 했다. 그 수개월
동안을 참고 지내다가 자기 자신의 나약함에 겁이 나서 하루는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저는 천주교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생활을 줄곧 슬프게만 해드립니다. 그러니 떠나게 허락하여 주십시오."
"거 잘되었다. 빠르면 빠를수록 더 좋겠다"하고 아버지가 선뜻 대답하였다.
우세영은 서울로 올라와 정의배 회장집에 유숙하기를 청하였다.
그는 정의배 마르코 집에서만 1년을 오로지 묵상 속에서 지내고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책을 베끼고 자기 가족을 위하여 천주님께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그의 기도는 효력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기분이 훨씬 나아진 것 같았고 그의 소식을 여러차례 물었으며 그를 다시 보고자 한다는 말을 황해도의 신자 두명에게서 들었다.
그는 서둘러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다. 그가 도착한 지 며칠 후
아버지는 그를 따로 불러 가지고 말하였다. "너도 알다시피 임금님과 나라의 고관들이 천주교를 박해하고 그 사람들을 죽여 마땅하다고 생가하고 있으며, 이 교를 믿는 사람은 종교의무를 지키지않고 특히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아서 자신의 명예를 떨어뜨린다고 하지 않느냐. 그렇지만 네 머리가 꽤 영리해서 심한 오류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고 또 마음이 착해서 네 늙은 아비와 온가족을 일부러 슬프게 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교의 비밀을 가르쳐다오. 아무 것도 숨기지 말고."
우세영은 매우 기뻐서 당장 천주교의 중요한 진리를 설명하기 시작하였고, 천주님의 은총의 도움으로 몇 주일 후에는 그의 아버지와 온가족이, 그리고 몇몇 친척들 모두 20명이나 함께 세례를
받았다. 이리하여 이제까지 천주교가 그리 전파되어 있지 않던 황해도 지방에도 우셍여의 활동으로 복음의 씨가 뿌려지게 되었는데
특히 그의 집안이 서흥지방에서 이름난 양반이었으므로 입교한 후
그 지방에서 그대로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집식구는
모든 조당을 끊어 버리고 그들의 종교를 자유로이 신봉하기 위하여 평안도 노재 고을로 이사하였다. 그러던 중 우세영의 아버지는
몇달 후 우러러 볼 신앙의 감정을 지닌 채 세상을 떠났다.
박해가 시작되엇을 때 우세영 알렉시오는 다른 신자 16명과 함께 붙잡혀 평양 중군영에 갇히게 되었다.
이 사실로 보면 병인년의 큰 박해는 이미 전 해의 겨울부터 시작되었던 것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은 때마침 1865년 11월에 러시아인이 경흥지방으로 침범하여 통상을 강요하게 됨으로서 일어난 사건인 것 같다.
정부에서는 국경지방의 병사에게 외국인과 통상하는 백성을 잡아들여 처벌하게 하였던 것이니 이러한 정부의 명령에 따라 우선
평안도의 교우들이 먼저 잡히게 된 것 같다.
이리하여 평안도 병사는 정부의 명에 따라 우세영을 혹독하게 다스리게 되었는데 특히 젊은 우세영은 첫번째 고문으로 말미암아
몸의 살이 다 헤지며, 뼈가 드러나게 되니 두번째 신문을 당할 때에 심약하여 배교한다는 말을 하였다. 그는 이내 풀려났다. 관정에서 나오자마자 그는 울기 시작하였고 자기의 잘못을 통회하였다.
그 후 사람들에게서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잡혔다는 말을 듣고는 "나는 파멸이야. 이제는 누구한테 내 죄를 고백하고 어디가서 용서를 받나"하고 부르짖었다.
그런 다음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진정으로 뉘우친 후 상처를 싸매달라고 하고서는 말 한필을 장만하여 서울로 떠났다. 그를 만류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말리지 마시오, 아마 너무 늦었을지도 모르겠소, 나는 내 죄를 고백하고 싶소. 그리고 신자들은 나를 아는 서울의 모든 이에게 내치욕과 내 뉘우침의 증인이 되어 주기를 원하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정의배 마르코 회장의 집으로 달려가 집안에 포졸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자기가 천주교인이라고 명백하게 선언하였다.
1866년 2월 26일 스승인 정의배 회장이 잡힌 바로 그 이튿날 즉시 체포되어 구류간으로 끌려갔는데 거기서 베르뇌 주교를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자기 죄의 사함을 받은 것과 그를 예수 그리스도께 나가게 해주었던 그 공경하올 주교의 권면으로 강해져서 그는 더욱 형벌에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참아받았다. 그의 내력을 알고 있는 관장은
그를 이기려고 여러차례 시도하였다.
"네가 그렇게 젊으니, 목숨이 아깝지 않느냐?"
"아깝습니다." 하고 우세영은 대답하였다.
"그러면 목숨을 건져라."
"저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리하여 형벌은 그 전보다 더욱 혹독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군문효수의 사형언도가 내려져 1866년 3월 11일 새남터 형장으로 끌려가는 데 다시금 투쟁을 겪어야 했다.
포졸들이 그에게,
"관장의 명령이니 배교하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내가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알고 왔으니 당신들이 무슨 말을 해도 나는 아무 말도 않겠습니다."
관리들은 계속해서 설득하려고 했다
"배교한다고 맹세 한마디만 하면 너는 풀려나서 살게 된다."
우세영은 대답했다.
"나는 그런 맹세는 할 줄 모르니, 맹세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은 다시 말했다.
"그럼 너는 죽을 것이다."
"나는 죽으려고 왔습니다."
그러자 재판관이 끼어들었다.
"한마디만 해라" 재판관은 젊은 그를 사살리고 싶어서 "한마디만
해라"하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하였다.
"나는 지난 번에 배교한 것이 몹시 가슴 아픕니다. 그러니 스승이신 주교님과 함께 죽기를 원합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의 등에 사형판결문이 붙여지고 우세영 알렉시오는 같은 형을 받게 된 세 명의 동지 정의배 회장,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와 함께 넘겨졌다. 그러나 처형장에 와서도 포졸들은
젊은 신앙증거자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지금이라도 한마디만 해라, 그러면 풀려난다. 한마디만 해라"하고
말했다.
그러나 우세영은 그의 운명에 만족해서 희광이의 칼아래 머리를 숙이는 편을 택했다. 그 때 그의 나이 22세였다.
6개월 후인 9월초 박해가 약간 숨이 죽었으므로 서울의 신자들은 새남터의 순교자들에게 좀더 정중한 장사를 지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무서운 해의 재난을 겪은 뒤 한층 더 가난해져서 관을 살 돈을 자기들끼리 모으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교우들은 유일한 장신구인 끼고 있던 가락지를 내놓아 정해진 시간에 40명의 신자가 밤을 타서 시체들을 거두어 안장했다.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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