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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오매트르 베드로     

 

 

 

 

 

 

    

 

성인 성 오매트르 베드로 

영문명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66.3.30 순교 
신분 신부  지역 한국 


성 오매트르(베드로 1837-1866)

한국성이 오씨인 베드로 오메트르는 1837년 4월 8일 앙굴렘교구에 있는 애젝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첫 아들이었는데 이 집안은 넉넉지 못한 집안이었으나 자녀는 다섯명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조그마한 땅을 경작하면서 나막신을 만들었다.
아버지는 훌륭한 천주교인이었고 어머니 역시 훌륭한 교인이엇다.어머니는 어떤 신비스러운 예감에 의해서 천주님께서 그의 맏아들에게 주시려고 하는 훌륭한 장례를 직감했다.

1862년 6월 사제서품을 받은 베드로 오메트르 신부는 8월 3일,"천주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사랑하시고 찬미하게 하라고 저를 보내시는 나라는 조선입니다."하고 아버지에게 알렸다. 그 뒤 고국을 떠나 패낭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두 조선인 신학생을 데리고 그 다음해인 1863년 6월달에 중국 어선을 타고 연평바다를 거쳐 비교적 무사히 1863년 6월 23일 그의 전교지방에 도착하게 되었다.

조선에 도착한 뒤에 수원 샘골에 배치된 오메트르 신부는 평소와 같이 끈기 있게 조선말을 배웠고 그런 다음 거주지가 미리내로 되어 있는 구역에서 성무집행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얼마 안 되어 다불뤼 주교가 활동하는 신리마을 거더리에서 꽤 가까운 곳인 내포지방에 자리잡았다.
그의 성직수행을 교우들은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했고 오메트르신부를 너그럽고 착한 사람으로 보았다. 베르뇌 주교도 그의 성직수행을 높이 평가했는데 오메트르 신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전해 주었다.
<이 작은 초심자가 어지간히 놀라운 일을 곧 잘합니다. 그는 힘과 어짐을 겸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가 맡은 교우집단을 잘 다스리고 그들에게 성체와 성모께 신심을 가르쳐 줍니다.>

1866년 초 서울을 중심으로 박해가 가해지기 시작하였고 베르뇌주교 등이 잡히게 되었다. 이런 소식을 듣고 교우들이 불안해 하자 그는 교우들에게,
"걱정마시오. 외교인들에게 천주교에 대해 소리 높이 말해 줄 때가왔습니다."하고 말했다.

그래도 그는 자문을 구하기 위해 거더리에 있던 다블뤼 주교를 만나러 떠났다. 오메트르 신부를 만난 다블뤼 주교는 인근마을 세거리에서 활동 중이던 위앵 신부도 불러서 여러 가지 의논을 하였다. 이 때가 다불뤼 주교가 잡히기 이틀 전인 3월 9일이었다. 다블뤼 주교나 두 신부 모두 이번 박해를 모면하리라고는 생각할 수도없을 만큼 박해는 심각하였고 그런 불안 속에 그들은 일단 헤어졌다.

이 때 오메트르 신부는 소덜로 갔고 위앵신부는 세거리로 돌아갔다. 그 뒤 오메트르 신부는 다블뤼 주교와 함께 밤을 이용하여 배를 타고 조선을 탈출해 보려고 하였으나 역풍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다시 그가 머무르던 교우촌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곳에서도 오래 숨어 있을 수 없었고 오메트르 신부 자신도 숨어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곧 다블뤼 주교를 찾아 거더리로 향했는데 그가 머무르고 있던 마을을 떠나기 전에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성물들을 어느 우물 속에 감추었다.

그것들을 가지고 떠날 수는 없었고 발각되면 교우들에게 누가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복사 이 빈첸시오를 데리고 신리를 향해 떠났다. 어느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 오메트르 신부는빈첸시오에게
"나는 신리쪽 거더리로 갈 텐데, 당신은 나하고, 같이 거더리로 가든지 공주쪽으로 가든지 마음대로 하시오"하고 말했다.
그러자 빈첸시오는,
"저는 신리로 갈 수는 없어요"하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가서 잘 숨어 있으시오. 나중에 다시 만납시다"하고 말하고 오메트르 신부는 혼자서 길을 계속해 새벽에 신리마을 다블뤼 주교가 사는 동네에 이르렀다.

그가 정자나무 곁에 서 있는 것을 한 포졸이 발견하고, 누구냐고 물었으나 신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포졸은 안으로 들어가, "방금 이상한 사람이 하나 왔습니다"하고 일렀다. 다블뤼 주교가 문을 열어 보고는, "여러 말 하지 말고 저 삶을 들어오게 하시오"  하고 말했다.

그 뒤 서울로 압송되어 오메트르 신부는 그의 어른이요, 아버지인 주교와 같이 문초를 당하고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군문효수의 사형선고를 받고 400리나 떨어진 사형장인 갈매못에서 1866년 3월 30일 정오에 주교 다음으로 참수치명하니  바로 그 날이 예수 수난 날이요 바로 그 때가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신 시간이었고, 그의 나이 29세였다.

1866년 3월 30일 갈매못에서 처형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이 세 성직자는 죽기 전에 특히 다불뤼 주교가 옷을 모두 벗겨 버리고 다른 순교자의 옷은 저고리만 벗겼으나 그 날밤에 어떤 악한 무리가 나타나서 남은 옷조차 모두 벗겨 가 버리게 되었다. 따라서 알몽둥이의 다섯 시체가 이후 3일 동안을 그대로 그 자리에 버려져 있게 되었으나 이상하게도 그 많은 까마귀와 개가 이들의 시체를 조금도 해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던 중 3일 후에 그 근처에 살던 외인들이 이들의 시체를 그 자리에 모래로 묻었으며 황석두 시체만이 며칠 후에 친척이 찾아가고 남은 시체는 그해 6월 초에 이르로 교우들이 찾아서 그 곳에서 30리쯤 떨어진 홍산 고을에 옮겨다가 묻게 되었는데 돈이 없어서 관을 마련하지 못하고 무덤 하나를 넓게 판 후 시체를 칠성판 하나씩에 받쳐서 묻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미 죽은지 두달이 넘은 이들 시체는 모두 썩지 않고 있었고 다만 위앵 신부의 그것만이 조금 썩기 시작하였을 뿐이었다고 한다.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