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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앙리 도리 헨리코    

 

 

 

 

 

 

    

 

성인 성 앙리 도리 헨리코 

영문명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66.3.7 순교 
신분 신부  지역 한국 


성 앙리 도리(헨리코 1837-1866)

한국 성이 김 씨인 베드로 앙리 도리는 동료들이 꼬마 또는 '방데지방의 작은 꽃'이라고 불렀다. 그는 뤼송교구의 생팅리르 드몽의 르 포르라는 동네에서 1839년 9월 23일, 즉 성 앵베르, 모방,샤스탕 등이 조선에서 순교한 다음날에 태어났다.

그는 드 베세 백작의 소작인인 아주 수수한 농부 가족의 팔남매 중 여섯째 아들이었다. 영세대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대부, 아기의 사촌형, 대모, 아기의 누나, 참석한 아버지 모두가 필요한 사항에 서명할 줄 모른다고 말했음>그러나 비록 지식은 도
리 비뇨노 집안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지 않지만 신앙은 높이 평가되고 있었고 부모는 많은 자녀의 확고한 그리스도적 교육을 보장
했다.
백작의 자선심 덕택으로 도리는 1852년 10월 소신학교에 입학해서 8년을 거기서 지내게 되었다. 그는 거기서 모든 이의 사랑을 받았고 졸업할 때에는 "성교회를 위하여 훌륭한 희망이 되는 소년"으로 소개받게 되었다.
중등부 1학년 때부터(그는 그때 15세였다)극동에서 전교하는 것을 생애의 목적으로 삼았으며 제일 좋아하는 독서가 잡지(유년)을읽는 것이었다. 그는 복권으로 이 잡지 전질을 탔었다. 그러는 동안 1860년에 뤼송의 대신학교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뛰어나지는 못했지만 성실하게 수학하였다.

천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영혼을 구하겠다는 간절한 소망으로 지탱된 근면 덕택으로 착실한 공부를 했다. 그는 공부와는 반대로 감정의 순진한 너그러움과 고상한 생각과 열렬한 신앙심과 선교에 대한 열망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뤼송 교구의 요청에 의해 1861년 12월 21일에 삭발례를 받고 이듬해 6월 14일에 서품을 받은 뒤에 그는 그해 학년말로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원서를 냈다. 출발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족과 교구와 ㄱ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은인을 떠나야 하는데 이들의 반대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뼈에 사무치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도리가 제일 먼저 그의 결심을 알린 사람 중의 하나는 드 베세 백작이었다.
백작은 심한 반발을 보였다. 그가 보호하는 학생의 병약한 체질이 그에게는 선교사 성소에 금기로 보였고 교구를 떠나는 것은 조심성을 무시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은인은 신학생의 부드러우면서도 확고한 결심에 손을 들고 굴복하고야 말았다.
"자네가 그렇게 원하니 떠나게. 그리고 천주님이 자네와 함께 계시기를 바라네."

도리 신학생은 다음에는 본당신부와 과감하게 맞섰다. 역시 본당신부도 똑같은 이의를 제기했다. 도리 신학생은 솔직하고 열렬하게 반박했다.
"신부님 저는 신부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건강합니다. 두고 보십시오. 선교생활의 피로를 감당해 낼 수 있을 테니요. 그리고  또..." 그는 이렇게 해서 마음 속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이 조그마한 몸뚱이로 천주님의 마음에 맞는 선교사가 되고 또누가 압니까 순교자가 된다면 신부님은 기쁘고 자랑스럽지 않으시겠습니까?"
착한 본당신부는 자기 교우의 명분에 완전히 끌려들어가 자기가 직접 선교사 지망자를 교구 주교에게 추천하겠다고 햇다. 주교는 떠나는 사람을 친절히 맞이해서 격려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강복을 주었다.

이 강복은 최종적인 이별의 예측으로 몹시 괴로와하는 부모 형제 자매에게 가까이 가는 데 매우 필요한 것이었다.

몇주일 동안의 방학이 그에게는 큰 시련이었다. 그가 파리로 출발하기로 정한 하루전까지도 부모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부는 되라, 그렇지만 교구에 남아 있지 외방전교회에는 갈 생각하지 마라"하고 어머니는 애원했다.
"어머니, 외방전교회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저로서는 할 수 없는일입니다. 그 계획을 세운 것이 8년이나 돼요. 천주님께서 제 마음
에 말씀하셨으니 저는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와 같이 있으면서도 천주님을 섬길 수 있지 않니?
제발 어미를 버리지 말아다오."
"그럼 어머니가 꼭 그렇게 하라고 하시니 어머니곁에 남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전교지방도 그만이고 신부되는 것도 그만입니다. 어서 바지하고 작업복하고 곡괭이를 주세요. 동생 있는데로 가서 같이 밭일을 할테니까요."

도리의 이 말로 어머니의 반대는 끝났다. 그러나 눈물이 마르지않았다. 아버지는 무거운 침묵을 지키며 아들과 그의 짐을 생팅레 르로 데려다 주고 옮기고 하는 것을 저녁내내 고집스럽게 거부했다. 그러다가 아들의 고통을 당해내지 못하고 마침내 중얼거리었다.
"자 뭣 좀 먹고 좀 쉬어라. 몇시간 후 생팅레르로 데려다 주마."

새벽 두시에 아버지는 집의 수레에 말을 매고 아들을 생팅레르 역으로 데리고 갔다. 때는 1861년 8월 11일이었다. 부모는 양보했으나 그렇다고 마음이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도리는 부모를 자기 성소의 수준에 올려 놓으려고 애정을 가지고 노력하였다. 그는 부모에게 자주 편지를 보내고 신품받을 사람의 기쁨을 알렸다, 그러나 부모는 여전히 고향에 돌아오는 것을 바라고 아들을 다시 보는 기쁨을 은총인양 청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기를 거부했다.
"나는 세상없이도 고향에는 돌아가지 않겠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마음 약함이 두려워서였고 무엇보다도 선교사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1864년 5월 21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그의 선교활동지역에 대한 장상들의 결정을 조용히 기다렸다. 6월 3일 어느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는 얼마 안있어 배를 타고 가라는데로 가게 되었네, 목적지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네, 티벳에서는 박해가 디시 시작되었고 조선사람들은 수많이 입교를 한다네. 거기건 다른 데건 상관없이 내가 떠나지 못하게 된다는 생각이나 마찬가지로 거기에 대한 생각은 이제 하지 않게 되었네. 이 평온이 언제까지고 계속되도록 기도해 주게.>

6월 13일 조선에 배정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이런 말을하였다.
"조선 만세! 내게 이렇게도 아름다운 전교지방을 주신 것을 천주님께 감사 드리세요."
이 전교 지방이 그에게는 두배로 아름다왔다. 그 곳이 주께서 그를 보내시는 땅, 그의 꿈과 기도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즉 복음을 위해 피흘리기를 희망하는 땅이었고 또한 그의 거룩한 친구 유스토 드 브르트니에르와 함께 있게 될 땅이었던 것이다.

그는 7월 19일 마르세이유에서 배를 타고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위앵 신부들과 같이 길고 위험한 항해를 했고 그들과 같이 1865년
5월 27일 조선에 몰래 들어왔다.

천주님께서는그의 착한 뜻만으로 만족하실 것이다. 도리 신부가 작은 교우촌 용인 손골리에 보내져서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아직 조선말을 배우고 있던 중에 박해가 일어났다. 그는 아직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지는 않고 있었다. 그도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통지를 받았으나 교우들의 체포가 뒤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 그는 참으로 박해가 시작되는 것인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런 상태에서 그는 교우들에게 해가 돌아가지 않을 수 있도록 그를 돌보고 있던 교우 이군옥까지 피신시킨 뒤에 그만이 2월 27일에 이선이의 밀고로 붙잡혔다.

그가 손골리에서 지낸 8개월간 교우들이 자기를 김신부라고 부르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기뻐했는데 그것은 조선에는 김이란 성을 가진 순교자가 많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과연 도리 신부는 자기의 소원대로 입국한지 10개월만에 볼리외 신부와 함께 투박한 들것에 실려 서울로 압송되어 서울 옥에서 동료들과 합류했다.

그 후 동료들과 같이 고문을 당했다. 승정원 일기에 보면 -이것이 조선식 성이었다.-도리는 고문을 당했는데 곤장 치는 것이 아홉차례에 가서 멈추어졌다고 한다.

그는 크나큰 용기를 보였다. 새남터의 형장에서 그는 눈을 감고 묵상하는 것 같았다고 한 증인이 말했는데 이 증인은 "나는 그 분이 순교에 대한 마음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하고 덧붙였다.

1866년 3월 7일 군문효수형으로 새남터에서 처형된 네 순교자 중에서 도리 신부는 맨마지막으로 참수되었는데 그의 머리는 두번째 칼에 떨어졌다. 그때에 그의 나이 27세였다.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