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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손자선 토마     

 

 

 

 

 

 

    

 

성인 성 손자선 토마  

영문명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66.3.30 순교 
신분 농부  지역 한국 


성 손자선(토마스 1843-1866)

손자선 토마스는 충청도 홍주 거더리 마을의 3대째 천주교를 신봉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신리에서 살고 있었다. 태중 교우로서 어려서부터 열심히 수계하였고 나이가 젊은 관계로 교회의 직무를 맡아 본 일은 없었다.

그는 점잖고 침착한 사람이엇고 놀랄 만한 독실한 교우이어서 어떤 일이 있어도 또, 아무리 바빠도 온 가족이 함께 저녁기도 드리는 것을 거른 적이 없었으며, 더 빨리 끝내려고 기도를 혼자서 하는 일이 켤코 없었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은 그의 규칙적인 생활과 좋은 행실을 칭찬하였지만 그가 그의 신앙증거때 보여 주게 될 영웅적인 용기를 가지고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매일의 일과에 충실해서 모범을 보이기는 했지만 단호한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박해가 일어나자 그에게 놀랄만한 용감성이 드러났던 것이다.

1866년 3월 11일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고 그 후 며칠이 지난 일이다. 덕산 관가에서 기별이 오기를 다블뤼 주교를 체포할 때 압수했던 돈과 물건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이 때 교우들 중 아무도 무서워서 가려고 하지 않았으나 손자선 토마스는 겁남을 무릎쓰고 포졸들이 빼앗아 간 주교의 돈을 찾으로 덕산으로 갔다.

그러나 관가에서는 그가 교우인 것을 알자 돈을 내주기는커녕 손자선을 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원이 신문하였다.
"네가 천주교인이냐?"
"그렇습니다. 천주의 은총으로 천주교인입니다."라고 똑똑히 대답하였다.
"네가 배교하지 않으면 주교의 돈을 돌려주지 않을 것이고 게다가 너는 죽게 된다."
"죽는 것이 아주 무서운 것은 사실이지만 저의 왕이시고 아버지이신 천주를 배반하는 것은 그보다 천배나 더 무섭습니다."

그러자 곧 묶이었고 고문이 시작되었다. 곤장이 세차게 내리쳐 져서 피가 철철 흘렀다. 형리들은 때때로 곤장을 멈추고 배교하라 고 일렀으나 그는 이를 여전히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는 매일 옷을 벗기워 곤장을 맞고,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포박을 당했다. 몇 번씩이나 거꾸로 매달아 오물을 얼굴에 붓고 입에도 처넣고 하였다. 이 더러운 모욕을 당하면서도 그는 다만 "잘 됐다"하는 한마디 말밖에는 하지 않았다.
"무엇이 잘 됐단 말이냐?"
"며칠째 세수를 못했는데 당신들이 이렇게 세수를 시켜주니,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께 피땀을 흘리게 해드린 죄인에게는 잘 된 일이고, 게다가 목이 말랐었는데 당신들이 내 입에 넣어 준 것은 내 죄 때문에 예수께서 마시신 쓸개와 초 대신이 되는 것이니 꽤 잘 됐단 말입니다."

또 한번은 손목을 붙들어 매서 매달았는데, 너무 오래 그렇게 놓아두자 같이 갇혀있던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보복당할 위험을 무릎쓰고 풀어주기까지 하였다.
그 사람들이 팔을 주물러서 썩은 피를 뽑아내려고 했으나, 그는 싫다고 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에수 마리아께서 오셔서 벌써 내 상처를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실제로 이튿날 그의 상처가 아물어 있었다. 덕산 원은 그를 해미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젊은 친구, 배교하면 풀어준다고 했는데도 이를 거부하니, 너를 해미로 보내는데, 너는 거기서 죽게된다. 해미로 가라."
해미로 이송되어 가자, 그 곳 관장이 이렇게 말했다.
"덕산에서 배교만 하면 놓아준다고 했는데, 왜 천주교를 버리지 않고 해미까지 왔느냐?"
"배교할 마음이 있었으면 덕산에서 배교했지, 제가 왜 해미까지 왔겠습니까? 저는 죽어도 배교는 못합니다."하고 그는 대답했다.
"배교할 때까지 저 놈을 매우 쳐라"하고 관장이 명령했다.

그래서 형리들이 그에게 다리가 부러지기까지 고문을 가했다 신앙증거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 때, 관장은 배교라고 간주할 수 있을 만한 어떤 표도 얻어내지 못하자 독특한 술책을 썼다.
"말만 가지고는네가 배교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기에 불충분하다. 만일 네가 네 이빨로 네 살을 한점 물어 뜯어내지 않으면 네가 배
교한 것으로 치고 돌려보내 주겠다."
그러자 손자선은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결코 배교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왜 그런 사람으로 치시겠다는 것입니까? 제 몸을 천주께서 만들어 주신 것이니
제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 몸을 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관장께서 제게 대해 아버지와 같은 권한을 가지고 게신데, 그렇게
하라고 명하시니 제 신앙을 지킨다는 증거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단 한번씩 물어서 양팔에서 살을 한점씩 뜯어냈다. 그러자 관리는,
"그만 됐다. 사형에 처하게 너를 감사께로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해미 마을에는 마음이 약해져서 배교한 손자선의 삼촌이 살고 있었다. 그 삼촌은 조카에게 편지를 보내 신앙을 버리라고 권했고 조카를 만나러 옥에 오기까지 했다. 손자선은 삼촌에게 그 편지에 쓴 그런 권고를 받고 크게 놀랐다고 하면서 다시는 편지를 보내지 말라고 답장을 썼다.

삼촌이 그를 보러 왔을 때 그는 삼촌에게 말했다. "그와 같은 동기로 오신다면 다시는 여기 오지 마십시오." 해미에 있는 동안 손자선은 줄곧 신자다운 생활을 충실하게 계속해서 기도를 드리고,금욕과 금식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자기의 옷까지도 가나한 사람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죽을 날이 2,3일 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렇게 좋은 옷이 내게 무슨소용 있는가?"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 후 공주의 관찰사로 압송해 가는데, 떠 메어 갈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심한 고문에 다리가 부러져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공주옥에서도 심한 고문을 받았다.
"이 흉악한 젊은 놈아, 너는 세군데 읍으로 옮겨져 다니면서도 배교를 아니했구나. 그래서 부러진 다리를 가지고 길을 다니는구나.이 흉악한 젊은 놈아, 너도 아무 부모 있을 터인, 배교하고 나가라" 손자선은 대답했다.
"배교를 했으면 다리가 부러지기 전에 했을 것입니다. 비록 죽어야 한다 해도 배교는 않겠습니다."

그는 고문을 세차례 받고 기절했다. 감사는 그렇게도 끈질길 데지쳐 버려서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리하여 손자선 토마스는 1866년 5월 18일 공주 옥에서 23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 후 사흘이 지나서 교우들이 토마스의 시신을 찾아서 덕산의 개골산 앞에다 묻었다가 20일 후에 신리로 옮겼는데 많은 시체 중 손자선 토마스의 것만은 도무지 썩지도 않고 아무런 냄새도 없었다고 당시의 교우들이 전하고 있다.

무덤의 표시로 손자선 토마스가 감옥에서 써보낸 기록을 술잔에 넣어 토마스의 발 옆에 놓았다고 하는데 이 기록문에는 토마스가 당한 문초와 고문의 환경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