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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손소벽 막달레나   

 

 

 

 

 

 

    

 

성인 성녀 손소벽 막달레나 

영문명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40.1.31 순교 
신분 부인  지역 한국 


성녀 손소벽(막달레나, 1801-1840)

손소벽 막달레나는 앞서 순교한 최창흡의 아내요, 최영이의 어머니가 되며 조신철의 장모가 된다.

서울 구교우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1801년 신유박해 때 아버지는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세상을 하직하였고 어머니도 일찍 돌아가시게 되어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는 성격이 온순하고 말씨가 상냥하고 몸가짐을 삼가는 품이 출중하였으며, 바느질과 수 솜씨같은 여자로서 할 일에 훌륭하였다고 한다.
원래 태중 교우였지만 패가된 가문에서 홀로 살아남은 손소벽인지라 더 이상의 불행이 두려워서 교우들과 같이 상종하지를 못하였고 또 오랫동안 교우가 없는 지방에서 살았기 때문에 천주교를 배우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늘 마음에 늘 사주구령에 힘써 지옥의 영고를 면하고 천당영복을 차지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교우들과 접촉하여 교리를 조금씩 배우게 되었고 열세살 때부터 수계하기 시작하였다.

열일곱살 때 최창흡에게 출가하였고 몇해가 안되어 콜레라로 사람들이 별안간 많이 죽어나감을 보고 남편과 함께 일가가 모두 대세를 받았고, 그 후 선교사들이 입국하게 되자 예비를 하여 성사를 받고 열심을 더하게 되었다. 손소벽은 자녀 열한명을 낳았으나 그중 아홉은 어려서 죽었고, 이제 슬하에는 맏딸 최영이와 두살난 막내딸 밖에 남지 않았다.

손소벽은 1839년 박해가 시작될 때 포교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친척들과 같이 숨어 있었으나 그해 7월 상순에 붙잡히고 말았다.
포도대장이 대강 문초하고 난 뒤에 포창이 여러가지 질문을 하였다.

"너는 누구에게서 천주교를 배웠느냐? 언제부터 신봉하느냐? 네집에 내왕하는 자는 몇명이나 되느냐? 네 집에서 꺼낸 물건은 무엇에 쓰이는 것이냐? 그 물건의 주인은 누구냐? 동교인을 대고천주를 배반하라."
"천주교를 배우기는 할머니께 배웠으며 어려서부터 봉행합니다.
말씀하시는 물건은 누가 들여온 것인지 똑똑히 알 수 없으며 동교인을 고발하면 그들이 해를 입을 터이니 말할 수 없고, 천주를 배반한다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한마디만 말하면 자유백방되어서 헤어진 딸과 남편과 함께 살수 있겠지만 만약 고집하면 죽으리라."
"제 목숨은 제 것이 아닙니다.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삶과 죽음을 다스리시는 천주를 배반해야 할터이니 그것은 할 수 없습니다."

손소벽은 일곱번이나 문초를 당하는 동안 주리를 세번 틀리고 곤장 260도를 맞아 살이 헤어져 떨어지고 상처에서는 피가 줄기지어 흘러 내렸다. 그러나 그녀는,"만일 천주께서 나를 도와 주시지 않으면 내 힘만 가지고는 다만 일각이라도 벼룩이나 이가 나를 뜯어먹는 것만이라도 참아 견딜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천주께서는 참아받을 힘을 내게 주시는것입니다."
"네 어린 자식이 불쌍하지도 않느냐? 생명을 보존하여라."
"주께서는 생사의 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나의 생명은 천주님께 달려있습니다. 그 분을 거역하면서까지 내 생명을 보존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천주님을 위해 죽으면, 천주님께서 내 딸을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하고 말하며 늘 천주께 감사드리는 것이었다.

손소벽은 두살된 막내딸을 옥안에까지 데리고 왔는데, 그 가엾은 어린 것이 공기도, 광선도, 또 어떤 때는 먹을 것까지도 없이 괴로와 하는 것을 보면, 혹 마음이 언잖고 용기가 꺾일지 모르므로 그를 품에서 떼어 일가 부인에게 맡겼다.

포청으로 이송된 후에도 포청에서와 마찬가지로 많은 곤욕과 혹형을 받았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또 세차례의 형문가운데 곤장을 맞고나서 결국 사형선고를 받았다.

7개월동안이나 옥고를 치른 후 1840년 1월 31일 당고개에서 참수치명하니 나이는 39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