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손선지 (베드로 1819-1866)
일명 '승훈"으로도 불렸던 손선지 베드로는 충청도 임천의 고인돌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결혼해서 두 자녀를 둔 아버지로 47세의 나이로 신앙을 위해 순교한 손선지의 상은 한국의 상징적인 훌륭한 천주교인의 상이다.
아버지가 아직 천주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받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어려서 세례를 받았고 아주 열성적인 신입교우인 아버지에게서 견실한 종교교육을 받았다.
온순하고 경건하고 열심힌 그가 얼마나 훌륭한 소직을 나타냈던지 1839년 순교한 샤스탕 신부는 손선지 베드로가 16세 때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전교회장의 직분을 맡기게까지 되었으며 그는이 직책을 죽을 때까지 교우들과 선교사들이 만족해 하는 가운데
잘 해냈다.
처음에는 충청도 임천 고을에서 살다가 전주 지방의 대성 고을로 이사와 자리 잡았는데 그이 집은 그 마을의 많은 교우들의 강당이 되었다. 교우들은 그의 집에 모여 기도도 드리고 교리문답을
배우기도 했다.
1866년 추수때에는 박해가 뜸했으나 논밭일이 끝나자 천주교인에 대한 수색이 더욱 심해졌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손선지는그것이 걱정되어 이렇게 식구들을 권면했다.
"곡식을 키로 까불어서 검불과 분리시키는 것처럼 천주께서도 박해때에 그렇게 하시는데, 나 같은 사람을 천주께서 당신 곳간에
받아 주실까요?"
하루는 나무꾼들이 손선지의 집 앞으로 지나가면서 "서양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오래지 않아 잡혀서 사형을 당할테니 이 마을은
쑥밭이 되겠구나"하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경종이 울리었다. 그래서 12월 5일 밤에 저녁기도를 드린 후 어린 아기가 그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무슨 일인지를 이내 알아챘다. 그는 식사준비에 골몰해 있는 아내에게 뒷문으로 해서 도망치라고
권하니 아내는 딸 데레사와 함께 가까운 밭으로 피해 달아났다.
그가 나가서 대문을 여니 포졸들이 와 있었다.
"당신들은 누구시오.?" 하고 그가 말하자,
"담배를 사러 왔소" 하고 포졸이 대답하였다
"담배 팔 것이 없는데요."
"답배 있고 없고간에 너를 체포한다. 가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체포하는거요?"
"서양교를 믿는 죄인으로 잡는 것이다. 서양교를 믿느냐?"
"믿습니다."
"그러면 가자."
그래서 손선지는 포졸들에게 끌려 그곳에서 3km 떨어진 구진버리 주막까지 갔는데 붙잡힌 다른 교우들도 그 곳으로 끌려와서 함께
밤을 지냈다.
그 동안 손선지는 어머니는 외교인이지만 천주교인들에 대해 화감을 가졌고 손선지에게도 잘 대해 왔던 그 마을의 관리인 오사문을 시켜 손을 써보려고 했다. 이 사람은 주막으로 가서 최홍태라른 포졸을 만나 손선지의 석방을 청하였다.
"그의 석방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고 죄인에게 달렸소. 그가 천주교인이 아니라고만 말하면 일이 어렵지 않을 거요. 그 사람을
놓아주리다."하고 포졸들이 대답했다. 오사문은 손선지의 곁으로
가서 말했다.
"한마디만 하면 자네는 돈을 많이 낼 것도 없이 풀려 날걸세. 한마디만 하게 그 교를 믿지 않는다고 말이야."
"그건 도저히 할 수 없네" 손선지는 분명히 말했다.
오사문이 포졸에게 가서 사실을 말하자 포졸은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천주교인이 아니라는 말한마디만 하면 그를 놓아줄 수 있는 핑계가 될거요. 그렇지만 그 말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니 절대로 석방할 수 없어요."
오사문이 다시 손선지에게 가서 배교를 권해 보았지만 그는 "나는 죽을 결심을 했네 그런데 자네가 하는 일이 내게는 큰 유혹이
되니 가주게"하고 말했다.
오사문은 마을로 돌아와서 그가 교섭한 일과 실패한 이야기를 했다. 그 이튿날 붙잡힌 사람들은 모두 일곱명이었다. 포졸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들의 체포를 명령한 관리가 주재하는 전주로 갔다.
관하에 도착하자 마자 손선지는 신문을 받았다.
"네가 천주교를 믿는다는데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저는 천주교를 믿습니다."
같은 질문이 세번이나 되풀이 되었다.
"네가 천주교 믿는 자들의우두머리니, 틀림없이 책을 많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책들을 갖다 바쳐라, 그 뿐아니라 서양인이 네 집엘 드나든다고 하는데 그 서양인이 어디로 갔는지 말해라" 퇴장이라는 직책이 알려져 아주 가혹한 고문을 가했는데 손선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책은 가진 것이 없습니다. 서양 사람은 며칠전에 들렀습니다
마는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사흘 후에 손선지는 다시 공식문초를 받고 고문을 당했으나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공식문초는 두번 뿐이었으나 포졸들에 의한 사사로운 형벌은 더 심해져서 제멋대로 질문하고 고문을 가했다.
그들은 손선지의 옷을 벗기고 넷이 한꺼번에 매질을 했다.
"네가 서양교의 우두머리라는데 네 집에 들른 서양인이 어디 있느냐? 서양교의 책을 어디다 두었느냐?" 그는 대답하였다.
"서양 선생은 우리 집에 왔다가 서울 쪽으로 갔소. 그러나 서울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오. 책으로 말하면 가진 것이 없소."
그러자 관졸들은,
"네가 책이 없다는 말이 되느냐?"하고 말하고 팔을 어그러지게 해서 부러뜨리기까지 했다
그때부터 손선지는 같이 갇혀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먹을 수도 없고 마실 수도 없었다. 그러나 한번도 정신적인 기력을 잃었다는 표를 보이지 않았다. 그가 체력이 줄어드는 것을 느꼈던 것일까? 죽기 며칠 전에 이미 오래지 않아 죽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이웃사람들에게 음식 이야기를 하면서 할 수 있는 한 음식을 잘 보관해 두라고 권했다.
용감한 손선지 회장은 끝내 계속 마음의 평온을 잃지 않고 모든 고통을 잘 참아 견디었다. 그가 숲정이 형장으로 향하기 위해 감옥을 나설 때도 그곳에 더 남아 기다려야 하는 다른 교우에게 옷을 주면서,
"나는 이제 죽으러 가오. 이 옷은 더 이상 내게 소용이 없으니 이옷을 입으시오"라고 태연하게 말하였다. 지정된 사형장에 도착해서도 손선지 베드로는 희공이 한테 목을 내주기 전에 먼저 얼굴을
하늘을 향하여 쳐들고 기도를 드렸다. 최요셉이란 사람은 손회장이 여러 번 계속해서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고 후에 증언하였다.
1866년 12월 13일 참수형이 선고되어 이윽고 숲정이 형장에서 칼을 든 병졸이 손선지 베드로 회장의 어깨를 내리치자 그는 죽은
체하기는 커녕 오히려 머리를 쳐들며 "장난하지 마시오"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희광이는 다시 칼을 높이 올렸다가 힘있게
내리쳐서 47세의 천주의 종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이때 구경꾼은서로 이런 말을 주고 받았다.
"저 사람이 첫번째 칼질을 받고 죽은 체했으면 살아남을 가망도 있었는데 바보같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영영 죽었네 그려."
처형된 지 3일이 지난 후에 교우들이 시체를 형장 근처의 용마루재에 안장하였다.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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