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랑페르
드 브르뜨니애르
(유스토 1838-1866)
1866년 3월 7일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들의 행렬에서 수고와 고통으로 인해서인지 나이보다는 오히려 노인처럼 보이는 주교 뒤에는 키가 크고 곱슬곱슬한 엷은 밤색머리에 얼굴이 부드럽고 명랑한 젊은 선교사가 따르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28세 밖에 되지않은 브르트니에르 신부였다.
그의 한국성은 백씨였다. 유스토 마리 드 브르트니에르는 1838년 2월 28일 프랑스 귀족가문인 샬롱의 노 판사 브르트니에르 남작과 그 부인 안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865년 5월 27일 저녁 여섯시에 브르트니에르 신부와 동료들은 조선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교우들은 친절과 놀람과 공포가 섞인
감정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교우들은 구원을 위하여 헌신하고자 오는 신부들을 보고 기뻐했다. 그러나 그들은 선교사들이 그들 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외국인들의 조선입국에 가담한 자들이당하는 사형이 두려웠다.
선교사들을 데리고 온 배주인조차도 감히 그들을 돌보려 하지않게 되었으니, 그는 계약을 이행했고 따라서 책임을 벗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베르뇌 주교가 불안한 마음으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서울에 갈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천주님의 섭리가 그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집이 불에 타버린 다블뤼 주교는 피난처를 찾아 내포지방에 와서 선교사들이 상륙했던 동네에서 20리 되는 곳에 있었다. 다블뤼주교는 선교사들이 와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와서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서둘러 안전하지 못한 그 곳에서
빠져 나오게 했다.
5월 28일 다불뤼 주교는 한 교우를 시켜 브르트니에르 신부를 서울로 인도하게 하고 자신은 그가 거처하던 거더리(합덕)교우촌으로 다른 선교사들을 데리고 갔다. 베르뇌 주교는 브르트니에르 신부를 기쁘게 맞이하고 그를 그냥 서울에 두기로 결정했다. 주교는
남대문밖 자암에 있는 회장 정의배 마르코의 집에 그의 거처를 정해 주었다.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다블뤼 주교가 오랫동안 살았던 9평방미터되는 좁은 방에 들었다. 그 방이 그의 사무실겸 경당 노릇을 했다.
거기서 1866년 2월까지 살면서 시간을 나누어 말도 배우고 기도도 드리고 했는데, 다만 세례와 견진을 주는 일과 밤에 주교를 찾아뵙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참된 피정의 생활을 거기서 했다.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그이 견디기 어려운 현실에서 선교사의 생활을 자각했다. 그 무렵 생 쉴피스 신학교의 이전 지도자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이런 종류의 생활을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아무리 되풀이해 주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찾아가는 순교가 피의 순교인 때는 드물겠지만, 언제나 좋건 싫건 즉공로가 있건 없건 자기의 모든 경향과 자기의 취미와 뜻을 버리는
순교일 것이며 대단히 심한 육체적 고행외에 그보다 더 많은 정신과 마음의 고행이 따를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글은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조선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거의 완전하 은둔상태에서 풍토순화와 적응과 말 공부라는 힘든시기를 지내고 있을 때 쓴 것이다.
오래지 않아 그는 휼륭한 사도 베르뇌 주교의 지도를 받으며 실질적인 사도직을 시작했다. 그가 80명 가량의 고백을 듣고 어른
40명에게 세례를 주고 몇 번 견진성사를 주고 여러번 병자의 성사를 주었는데 1866년 2월에 박해가 일어났다.
그가 혼배성사를 집전하고 견진성사를 주고 있었을 때 2월 23일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서둘러 그 소식을 다불뤼 주교와 거주지를 아는 선교사들에게 알렸다.
2월 24일 하루는 조용히 지나갔다.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미사성제를 드렸다. 그것이 마지막 미사가 되었다. 25일 그가 살던 집주인 정의배가 붙잡혔고, 그는 그날 하루밤 하루밤을 감시를 받으며
지냈다. 26일 이번에는 그가 붙잡혔다. 그는 포졸들에게 "당신이
올 줄 알았소"라고만 말했다. 결박은 당하지 않고 그저 옷소매만
붙들린 채 포청으로 끌려갔다. 신문을 당하자 그는 이렇게 똑똑히
말했다.
"나는 당신들의 영혼을 구하려고 조선에 왔소. 나는 천주를 위해 기꺼이 죽겠소."
그리고 조선말로 완전히 알리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 달라고 했다.
그 포청에서 하루 낮 밤을 지낸 뒤 금부 옥으로 끌려갔다. 그의 목에는 칼이 씌워지고 발에는 사슬이 채워졌다. 포도청에서 그는
신문은 당하지 않고 고문만 당했는데 형벌을 한 마디 말도 없이
견디었다.
그는 주교와 운명을 같이해서 3월 6일 주교와 동시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이튼날 앞서 이미 서술한 절차에 따라 형장으로 끌려갔다.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형장에 갔을 때, 목이 몹시 말랐다. 그래서 포졸들에게 물을 좀 달라고 청했으나, 이들은 듣지 못했거나 혹은
못들은 체했다.
그것을 목격한 증인 박 베드로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 물 한바가지를 떠 가지고 와서 형벌 받는 사람에게 갖다 주게 하라고 관리에게 청했다. 집행관은 한 병졸에게 갖자 주라고 명했다. 그러나
병졸은 분개해서 물을 땅에 쏟아 버리며 말했다.
"금방 죽을 죄인들에게 먹을 물을 줘서 뭘 합니까?" 그러자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그의 머리 위에 늘어져 있는 밧줄 끝을 움켜 잡아 씹었다. 그러니까 침이 약간 생겨서 그것을 한숨을 쉬며 삼켰다. 구경꾼 하나가 "너희 나라에서는 아무것도 않던 네가 남의 나라에서 이렇게 죽으니 후회가 되지 않느냐?" 하고 외치자,
"그대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나는 이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 신부는 대답했다. 그리고 "좋다"는 말을 세번 되풀이했다.
팔방돌이를 하는 동안 신부의 허리띠가 끊어져 바지가 흘러내렸다. 집행관은 병졸에게 바지를 추켜 주라고 명했다.
베르뇌 주교와 몇마디 마지막 대화를 나눈 다음 베르뇌 주교의 참수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어 브르트니에르 신부의 차례가 되어 네번째가 다섯 번째로 내려친 칼에 그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이들 순교자들의 머리는 그 곳에 사흘간 매달려 군중들에게 현시되었다가 후에 교우들이 정성껏 안장하였다.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