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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볼리외 루도비코      

 

 

 

 

 

 

    

 

성인 성 볼리외 루도비코 

영문명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66.3.7 순교 
신분 신부  지역 한국 


성 볼리외 (루도비코 1840-1866)

한국명 서몰례로 불리는 베르나르 볼리외는 프랑스 보르도 교구인 랑곤에서 1840년 10월 8일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결혼한 지 다섯달만인 1840년 5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한편 19세밖에 안되었던 그의 어머니는 성품이 온화한데다 열심하여 이 어린 아들을 성모님께 봉헌하였다. 그리고 1843년에는 볼리외의 장래 교육을 위해서 죽은 남편이 하던 장사를 포기하고 딸 하나를 데리고 사는 홀아비 뒤푸르씨와 재혼했다.
볼리외는 여섯살 되던 해에 공만힉교에 들어갔다. 이 학교에서는 다행히도 교사들이 학생들의 종교교육을 잘 지도하고 있었다. 볼리외는 일곱살 때부터 복사를 하였는데 아마도 이 때부터 이 소년안에 성소의 싹이 트기 시작했던 것 같다.

당시 담임선생은 볼리외의 부모를 설득하여 1849년 10월 보르도에 있는 소신학교로 볼리외를 보냈다.

같은 해에 볼리외는 보르도에서 다시 숙천(중국시명)에서 전교생활을 한 신부에게 가 있게 되었는데 먼 나라 중국에서의 전교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여러번 듣게 되면서 어린 볼리외 마음 안에는 전교에 대한 열망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1857년 볼리외는 보르도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여 사제직을 성실히 준비하였다. 한편 그의 성품도 성숙되어 갔다. 어느날 그와 가장 친했던 벗 아멜리앵 비락이 죽게 되자 볼리외는 그의 아버지한테 "저는 아드님이 운명할 때 증표를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리고 아드님이 천당에 들어가던 날에는 천주님께 선교사로서 죽는 특은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1858년 11월 7일 갑자기 볼리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남편이 죽을 때와 같은 심한 고통으르 사경을 헤매다가 이땅 위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 볼리외와 마지막 혈육의 정을 끊었던것이다.
한편 볼리외는 선교사의 길을 떠나려면 아직도 4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까닭인즉 지도 신부가 볼리외의 성소를 좀더 확실히 알아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교구일에 집착해 있던 보르도교구 대주교가 누구든 교구를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아 볼리외가 청원할 때마다 매번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볼리외는 이에 결코 굽히지 않고 파리외방전교회 장상에게 전교지망의 편지를 자주 올려 가며 그 어느 때 보다도 전교신부생활에큰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볼리외는 연령 미달로 사제서품을 못받고 때를 기다리는 동안 소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1863년 3월 볼리외는 폐렴에 걸려 죽을 뻔했었는데 얼마 후 또재발되었기 때문에 그의 전교신부생활의 희망은 전혀 실현될 수없는 듯했다. 그런데 같은 해 8월 도네 대주교가 의외로 이 청년 볼리외에게즉시 출국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려 주었다.볼리외는 이 때의 기쁨을 "내 안에서 힘이 다시 생겨나고 즐거움도 몇 배로 더 하였다"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자식처럼 돌보아 주었던 숙부로부터 심한반대가 있었고 또 다른 어려움도 계속 뒤따랐다.당시 볼리외는 숙부집에 살면서 친 아들처럼 사랑을 받고 있었을 뿐 아니라 출발 준비물까지도 실상은 숙부에게 부담을 끼쳐야할 형편이었다. 그렇지만 볼리외는 이런 모든 것에 결코 굴하지 않고 자기 결심을 굳혀 8월 27일 숙부집을 떠나 그 달말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쉽게 주위환경에 적응하면서 필요한 애덕생활과 선행생활을 누구라도 감탄할 만큼 열심히 닦아나갔다.

또한 볼리외는 무엇보다도 성실한 사제과 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겸손되이 기도하며 이윽고 1864년 5월 21일 사제품에 오르게 되었다. 같은해 6월 15일 볼리외 신부는 한국의 전교신부로 지명되자 즉시 출발을 서둘렀다. 물론 볼리외 신부는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당에서의 전교가 대단히 어려운 형편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출발을 주저하지 않았다.

볼리외 신부는 1864년 7월 15일 프랑스를 출발하여 1865년 5우러 27일 조선에 도착하였다. 물론 장주교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장주교는 그 때의 상황 때문에 전교 신부들을 분산시켜 산골 교우촌으로 피신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볼리외(서) 신부와 도리(김) 신부는 서로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규칙적으로 왕래하면서 고해성사도 보고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이들은 외교인들이나 관헌들의 눈을 피해야 했는데 상복을 입고 다님으로써 서양 사람으모습을 감출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서로 만나면, "이토록 잘 조직된 전교지방에 오게 되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이곳에서 가장 귀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 나라에 있는 주교들과 전교신부들이 모두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있는 사실입니다"라고 행복스럽게 서로 대화하면서 조선말을 익히곤 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전교신부로서의 처신을 잘 지켜 행여나 실수를 하지 않도록 무척 조심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어느 한순간이라도 술에 취하여 실수로 튀어나오는 말 한마디가 교우들을 대량 학살케 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착하신 천주님은 우리를 어떻게 심판하실까? 이는오직 그분만이 아시는 일이지만 우리 모두 누구보다도 내가 먼저 지켜야 할 서약은 우리의 고귀한 신분에 맞추어 생명보다 천주님을 더 사랑하여야 할 중대의무를 증거할 줄 앎이로다. 우리는 모 두 위대한 성인들이 되도록 천주님을 열렬히 사랑해야 할지로다.>

1866년 2월에 접어들자 볼리외 신부는 성무수행에 불편이 없을 정도로 조선말에 능숙해졌다. 그래서 베르뇌 주교는 볼리외 신부에게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수십리 떨어진 광주지방을 맡아보라고 명령하였다. 그런데 볼리외 신부가 짐을 꾸려 막 떠나려 할 무렵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2월 27일 볼리외 신부의집 주인이었던 장제철의 밀고로 새벽 둔토리 마을에 갑자기 포졸들이 습격하여 볼리외 신부를 붙잡아 서울로 압송하였던 것이다. 볼리외 신부는 옥고와 고문끝에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았다. 3월 7일 볼리외 신부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새남터 사형장으로 끌려 나갔고 정해진 의식이 거행된 후 브르트 니에르 신부 다음으로 참수되었다.

볼리외 신부의 목은 세번째 칼날에 땅에 떨어졌고 그의 머리는 3일동안 그곳에 높이 매달려 현시되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군문효수란 극형을 선고받고 1866년 3월 7일 새남터에서 참수당한 베르뇌, 브르트니에르, 도리, 볼리외 네 분 성인의 시체는 처형된 후 그대로 버려져 있었는데 그 부근에 살던 외교인들이 4일 후에 그 곳에 구덩이를 파고 함께 묻었다.

조선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의 일가나 친구가 그 시체를 찾아 다가 묻거나 그렇지 못하면 그 죽인 곳이 마주 보이는 동네에 묻는 법이었다. 서울의 교우들은 이 거룩한 시체들을 찾아 묻을 생각은 간절했으나 그 때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교우들은 6개월 후에야 이들을 다시 파서 서울에서 남쪽으로 5리쯤 떨어진 외와고개(지금 용산 우체국 뒷고개)골짜기에 묻었다.
이 어려운 일을 맡아 본 교우는 한때 왕궁의 호위병을 지냈고 한강가의 서빙고에 숨어 살고 있던 전교회장 박순집 베드로였다.

성인의 유해는 현재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