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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르뇌 시므온      

 

 

 

 

 

 

    

 

성인 성 베르뇌 시므온 

영문명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66.3.7 순교 
신분 주교  지역 한국 


성 베르뇌 (시메온 1814-1866)


한국명은 장경일이요, 세레명은 시메온인 프랑스와 베르뇌는 르망교구의 샤토 뒤르와르에서 1814년 5월 14일에 태어났다.

페레올 주교의 사망 후 3년만에 베르뇌 주교가 조선교구 제 4대 주교로 입국하게 된 것이다. 베르뇌 주교는 서울에 들어온 후 그 동안에 겪은 고생으로 말미암아 심한 병환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베르뇌 주교의 건강도 차차 회복되어 5명의 신부를 거느리고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서 전교에 힘쓰게 되었다.

언제나 지칠 모르는 베르뇌 주교는 우선 서울에서 40일 동안 있으면서 조선말을 배우는 한편 전교의 방침을 세우고 나서 이후 8개월 동안은 경기도 지방에 전교하기 위하여 돌아다녔으니 그의놀라운 정열을 가히 엿볼 수 있다. 그는 하루에 22시간 동안을 공부에 바치고 겨우 두 시간 동안 잠자리에 누웠다고 하는데 그때에 사방에서 이름난 사람들이 성교로 나오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우선 학당을 배론에 세워 신학생을 양성하기(1856-1866년)시작하고 출판업도 착수했으며 다블뤼 신부를 부주교로 임명하는 등 실로 10년 동안 눈부신 활동을 했다. 동료 선교사에게나 신자들에게 대해서도 한결같이 공정하고 자비로운 목자가 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신자들은 나날이 그 수가 불어나게 되었다. 참으로 베르뇌 주교는 글자 그대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진정한 지도자였던 것이다.

천주교 박해가 다시 일어남에 따라 1866년 2월 23일 수많은 군졸들이 주교의 집을 포위하고 포졸 여러 명이 집아느올 들어왔다.
주교가 그들을 맞이하니 "당신은 양반이요?"하고 한 포교가 물었다. 주교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그 포교는
"당신 서양 사람이요?"하고 재차 물었다.
"그렇소. 그런데 여기는 왜 왔소?"
"임금님의 명령으로 서양사람을 잡으러 왔소."
"좋소, 밥을 좀 먹고 오겠소"하고 대답하고는 식사를 마친 뒤 포졸들이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는 가운데 주교가 물었다.
"어떻게 하고(무슨 옷을 입고)가야 하겠소?"
"그대로요."

그리고는 결박을 하지도 않고 그다지 심하게 다루지도 않으면서데려다가 포도청에 가두었다.

포졸들은 갇힌 이의 품위에 감명을 받아 일반 옥에 가두지 않고 그들의 초소 안에 마련된 장소에 가두고 발을 사슬로 묶은 채, 여러 날을 엄중히 감시했다. 주교는 다시 포도청 옥으로 옮겨졌는데그 때에는 칼까지 씌웠다.

<일성록>에는 신문 때마다 주교에게 고문이 가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거기에는 베르뇌 주교의 경우, 고문이 열 차례나 열 한 차례에 가서 멈추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의자 다리만큼 굵은 세모 몽둥이로 열 번이나 열 한번 정강이를 힘꺼 내리쳤다는 뜻이다.

주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다만 매를 맞을 때마다 긴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 증인이 말하였다. 주교가 혼자서는 몽을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포졸들이 감방으로 옮겨 가야 했는데, 약이라고는 없었고, 그중의 한사람이 살이 떨어져 나간 주교의 다리를 유지로 처매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동안 2월 26일에는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붙잡혔고 27일에는 도리(김)신부와 볼리외(서)신부가 잡혔다. 세 사람이 모두 주교가 있는 옥에 갇혔고 신문과 고문을 같이 당하였다.

3월 7일에는 주교와 그의 사도직과 옥살이의 동료 세 사람이 일반 옥으로 옮겨져서 그곳 맨땅위에 선고의 결과를 기다렸다.

이 날짜에 대하여 <일성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금부에서 다음과 같이 아룁니다. 그 서양인 네 명에 대하여는 1839년의 전례에 따라 군 당국에 넘겨주어 참수하고 효수하여 무리들에게 교훈이 되게 하고자 하나이다'하니 임금은 윤허하였다.>

홍봉주(토마스)가 다블뤼 주교에게 한 말 가운데서 베르뇌 주교가 가졌던 태도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주교님은 항상 품위와 성덕이 가득차 계셨습니다."
이번에는 순교가 앞서의 경우처럼 그에게 빠져 달아나게 되지 않을 것 같았는데 드디어 많은 일을 ㅎ고 많은 고통을 겪은 생애를 끝마무리를 지을 참이었다.

3월 7일 주교와 세 선교사는 그들의 영광스러운 죽음을 향해 형장 새남터로 떠났다. 그들은 투박한 들것에 머리와 몸이 밧줄로 단단히 묶인 채 누워 있었다. 옥에서 나오면서 주교는 이렇게 외쳤다.
"우리가 조선에서 이렇게 죽으니 잘되었다."
성문에 모여있는 군중을 보자 주교는 여러 번 한숨을 지었다.
"아, 저 사람들이 어찌 불쌍하지 않으리오!"
그는 자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주의 전갈을 물리치는 사람들과 크나큰 불행을 당할 것으로 예측되는그의 교구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엇다.

행렬은 여러 번 정지했다. 주교는 그 틈을 타서 형벌을 같이 받는 그의 동료들에게 천국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세 사람은 모두 매우 기쁜 표정으로 눈을 하늘로 향했다.

호위 군사 400여 명이 빙 둘러서고 중앙에 깃대를 하나 세우고 사형집행을 주재하게 될 관리의 장막을 세웠다. 준비가 끝나자 관리는 사형수들을 그의 앞으로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이들은 들것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그들의 팔다리는 오랫동안 아주 단단히 묶여 있었기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병졸들에게 부축되어서 관리앞에 출두했다.

그리고는 사형을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옷을 벗기고, '사교죄인 아무개'란 글이 씌어 있는 속 적삼도 벗기고 귀를 접어 화살로 꿰뚫고 얼굴에 물을 뿌린 다음 생석회를 뿌렸다. 그러니까 사형수들은 눈을 뜨지 못하게 되었고, 회가 상처 입은 귀에서 흘러 내리는 피와 엉기었다.

그런 다음 뒤에 함께 겨드랑이에 굵은 몽둥이를 찔러 넣어 그 양쪽 끝을 병졸 한 사람씩 들러 매게 되어 있다.
그리고 팔방돌이라고 하는 행진이 시작되어 군사들 앞으로 구경꾼들이 보는 가운데 사형장을 돌았다. 주교가 맨앞에 가고 세 선교사가 뒤를 따랐다. 이 비통한 행렬이 사형장을 여덟 바퀴 돌아 마침내 사형장 한가운데에 이르게 되었다.

흰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깃대 가까이 와서 사형수들은 땅바닥에 내려지고, 집행관은 사형선고문을 읽으라고 명령했다.
<너희 모두 듣거라. 너희가 전파하는 종교는 조선에서 엄금하는 바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남의 나라에 와서 너희 사교를 전파하였
다. 그러므로 조선 국왕께서는 너희들을 사형에 처하라고 멍하신다. 너희는 그것을 알아라. 너희는 곧 죽을 것이다.>

주교와 선교사들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생석회로 눈이다 타버려서 그들은 서로 볼 수가 없었다. 이 광경을 지켜 본 교우들은 백발 때문에 알아볼 수 있는 주교를 빼놓고는 그들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최후의 제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관리가 신호를 하자 각기 칼을 든 희광이 여섯명이 "자아! 저놈들을 죽이자, 쳐죽이자"라고 외치면서 신앙 증거자들에게로 달려들었다.

병졸이 주교의 머리채에 단단히 밧줄을 매어 그 한 끝은 깃대에 붙들어 매고 다른 끝은 병졸 한 사람의 다리에 감았다. 그리하여 희생자의 목을 꼿꼿이 하고 머리는 앞으로 숙여지게 하니, 희광이 한 사람이 주교를 내리쳤다. 그러나 그의 머리는 칼을 두번 맞고서야 떨어졌다.
군사들이 머리를 주워 집행관에게 갖다 보인 다음 처형된 시체 주위에 말뚝 네 개를 땅에 박고 위르 다발로 묶어 그곳에 머리채를 매달았다. 이 때 베르뇌 주교의 나이 52세였다.
증인들의 말에 의하면 주교는 형집행을 당하는 순간에 드 브르트니에르 신부에게 말을 건네면서 미소를 지었고, 그의 머리는 죽었을 때에도 그대로 미소짓고 있었다고 한다.

베르뇌 주교의 머리는 참수된 후 효수하였다.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