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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박희순 루치아     

 

 

 

 

 

 

    

 

성인 성녀 박희순 루치아 

영문명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39.5.24 순교 
신분 동정궁녀  지역 한국 


성녀 박희순(루시아 1800-1839)

박희순 루시아는 서울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순진하고 명랑하고 상냥한 성격에다 재주와 미모가 비범하였으므로 모든이의 감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이미 어린 나이에 궁녀로 뽑히어 대궐에서 자랐는데 거기에서도 그의 순결하고 순박함이 동료들보다 뛰어나서 웃사람들의 총애를 받았다.

희순이가 15세가 채 못되었을 때에 당시 16-17세된 어린 순조 임금이 그의 매력에 이끌려 유혹하려고 별별 수단을 다 썼다고 한다.
그러나 어린 처녀는 외교인데도 불구하고, 앵베르 주교가 조선에서는 일찌기 들은 적이 없다고 할 만큼 굳건한 용기와 이와같은 놀라운 덕이 있었으니 입교의 은헤는 어느정도 상으로 주신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형조의 보고에 의하면 박희순은 일찌기 창녕위궁의 나인이었다. 창녕위란 다름아닌 순조의 사위 김병주로, 순조의 둘째딸 복온공주가 이 사람에게 출가했었다. 그런데 희순이 국문과 한문에 능통하였기 때문에 복온 공주에게 글을 가르쳤다고 전하는데 아마 이것이 인연이 되어 창녕위궁의 나인으로 발탁되었을 것이다.

그는 서른살 때 처음으로 천주교 이야기를 듣고 믿을 마음이 간절했으나, 궁중에 매인 몸일 뿐아니라 김대비의 깊은 총애를 받으며 다른 궁녀들을 감독하는 상궁의 자리에 있었고 선왕의 위패를 지키는 소임이 있던 만큼 빠져 나오기가 매우 힘들었다.
하지만 천주교를 실천하려면 대궐의 온갖 미신 행위를 피해야 했으므로 이 모든 장애는 그의 소원을 더욱 간절하게 할 따름이었다.
마침내 희순은 용감하게 결심하고 병을 핑계로 하여 본가로 나가라는 허락을 받았으나 어머니는 별세하였고 아버지가 외인으로 천주교를 대단히 반대하였으므로 집으로는 가지 못하고 남대문 밖 조카집에 가서 같이 살면서 차례로 조카와 온 집안을 권면하여 모두 입교시키었다. 이 때 큰아기 마리아도 같이 살았으며, 함께 수계하였다.

궁궐을 나온 후부터는 영화와 쾌락 속에서 하는 일 없이 많은 세월을 허송한 것을 생각하고 열심을 배가하여 모든 본분을 어김없이 지키었고, 특별히 옷과 음식에 있어서 많은 극기를 행하였으며, 애긍에 힘썼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상본 앞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의 오상을 묵상하며 눈물을 흘렸다.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도 다 천주님과 결합되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열성과 고신 극기의 표양이 교우들을 감동케 했다.

박해가 일어나자, 그이 집이 고발되어, 조카는 집을 팔아 버렸다. 그래서 같은 궁녀출신인 전경협 아가다라는 훌륭한 교우를 알게 되어 희순은 남은 식구를 데리고 아가다의 집으로 이사하여 함께 살았다.
며칠 후에 전경협과 둘이서 박해를 피할 방도를 의논하고 있을 즈음에 갑자기 포졸들이 달려 들었다. 이 때 희순은 태연하게 "모든 것이 주명이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하며 그들에게 마중나가 너무 소리를 지르지 말라고 청하고 음식으로 전 가족을 격려했다.

포졸들에게 엽전 몇 꾸러미와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너서 포졸을 따라 기쁘게 포도청으로 향했다. 이때 아주 나이 어린 희순의 조카 박베드로도 같이 잡혀 갔었는데 석방되어 후에 두 고모가 잡히어 순교한 사실을 상세하게 증언하게 되었다.
이들이 옥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발에 족쇄라는 형틀이 채워졌다.
이 족쇄는 길이가 0,4미터, 너비 0.15미터가량 되는 나무관 두 쪽을 겹쳐서 만든 것으로 양쪽에 짜개미가 있어 거기에 한쪽 발이나 양쪽 발목을 끼운 뒤에 한편은 돌쩌귀로 한짝과 연결되고 또 한편은 자물쇠로 채우게 마련된 위짝을 내리 덮는 형틀이다. 기해년에 잡힌 교우들에게는 모두 이 형틀이 채워졌다.

포도청에 갇힌 이들 교우 가운데에 궁녀도 끼어 있다는 소식을 듣자, 대왕대비는 괘씸하게 생각한 나머지, "비록 전에 궁녀일지라
도 증거가 확실하면 궁의 대표에게 알린 후에 체포해도 무방하다"는 격려의 지시까지 내리게 되었다.

포장이 희순에게,
"궁녀는 다른 부녀들과 매우 다르거늘 어떻게 되어서 그와같은 천한 사교를 믿는단 말이냐?" 그러자 박희순은 대답하였다.

"우리 종교는 절대로 천한 것이 아닙니다. 천주님이 하늘과 땅과 그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었고, 모든 사람이 천주님께 생명을 받았으니 마땅히 천주를 찬미하고 흠숭하여야 됩니다."
"천주교를 배반하고 동교인을 대라."
"천주는 저의 조물주시요. 아버지시니 그를 배반할 수 없고 사람해치는 것을 금하시닌 교우들을 고발할 수도 없습니다."

포장은 그의 손을 뒤로 하여 결박하여 형조로 보내기로 하고 이에 대하여,
"희순이는 비록 궁녀이지만 이미 집에서 체포되었으므로 다른 죄수의 예에 의해서 형조로 이송하겠습니다."라는 구실을 붙였다.

형조로 옮겨간 후에도 재판관들 앞에 세번 출두하여 그 때마다 곤장 30대씩 맞았다. 그리하여 다리뼈가 드러나고 피를 흘리었으나 희순은 태연하게,  "이제야 오 주예수와 성모마리아의 괴로움이 어떠하였는지를 조금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번 문초 때에 제발로 걸어서 출두하니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이상히 여겼고 재판관은 그것을 마술로 돌리였다.
하루는 박희순이 천주교 도리를 너무나 명백히 설명하였으므로 재판관도 감히 그것을 반박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그는 옥중에서 교우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돌려 보게 하였다. 이편지는 불행히 분실되었으나, 예수와 마리아, 천신, 성인의 은혜를 찬미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를 낮춘 겸손의 말이었기 때문에 이편지를 보는 사람이 다 깊은 감동을 느끼었으며 눈물을 금치 못하 였다고 한다. 희순은 함께 갇혀있는 이들을 가르치며 근심하는 이를 위로하고 약한 이를 붙들어 주며 언제나 또한 누구를 대하여서나 사도로서의 일을 하였다.

박희순을 도저히 배교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형조판서는 "희순이 동류와 얽혀, 밤낮없이 깊이 빠져서 행동이 모두 요사하고 허황하며 입으로 중얼거리고 손으로 가리키는 것이 다 사술이고 죽기를 맹세하면서 뉘우치지 아니하니 이는 부대시참의 죄인입니다."라고 보고한 후 참수의 판결을 내렸다.

기해년 5월 24일 형장으로 떠나기 전에 감옥의 교우들에게 같이 순교의 길을 걷자고 위로하고 격려한 다음 태연한 용모로 수레에 올라 기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서소문 밖 형장에 이르러 동료 8명과 같이 참수치명하니 때에 그의 나이 39세였다.

언니(박 큰아기) 마리아도 희순과 같이 사형선고를 받기는 했으나 국법에 같은날 형제를 죽이는 것을 금하고 있으므로 부득히 동생과 이별해야 했다.

감옥에서 동거하며 의지하고 지내던 교우들도 다 먼저 치명한 희순 루시아를 생각하며 그의 늘 침착하고 애정에 찼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치명하기 전 어느 날 희순 루시아는 남더머로 형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청이 하나 있는데 내 목을 벨 적에 냉정을 잃지 말도록 칼날을 잘 세워두었다가 결코 헛 칼질을 말고 단번에 내 목을 잘라 주기바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