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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박후재 요한     

 

 

 

 

 

 

    

 

성인 성 박후재 요한 

영문명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39.9.3 순교 
신분 상인  지역 한국 


성 박후재(요한 1798-1839)

조정이 일시 교우의 검거마저 등한시해 가며 충청도 일대에서 모방신부와 샤스탕 신부 등 소위 양인 두명을 체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집중시키고 있는 동안 서울에서는 9월 3일 박후재를 선두로 6명의 교우가 그들의 고귀한 신앙을 고수하기 위하여 혈제를 올려야 했다.
박후재 요한은 1798년에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다. 원래 부모가 교우였던 관계로 그는 이미 유아시에 세례를 받았으나 신부로 부터 보례를 받은 것은 거의 중년에 이르러서이다.
관변측 기록에는 그의 이름이 후재로 되어 있었으나 기해일기에는 명관으로 되어 있느 것으로 보아 교우들간에는 명관으로 불린듯하다.
명관의 생애와 순교사실에 괸해서는 기해일기 외에도 바로 명관의 아내 안나의 생생한 증언으로 그 확실성을 한층 더해주고 있다
원래 친척이 없어 고독한 처지에 신유년(1801년)의 박해로 아버지 박 라우렌시오마저 여윈 이래 어머니를 모시고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박후재는 양반도 아니요 부자도 아니지만 항상 참수치명한 아버지의 피가 그의 혈관 속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었다. 안나의 부모가 그의 딸을 후재오 결혼시킨 이유는 당시 모든 교우들이 후재의 덕행을 칭찬해 마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후재가 결혼한 것은 36세 때의 일이고 그 때 그는 한강가에 있는 오막살이에서 지내고 있었다. 어머니는 멀고 가까움을 따질것 없이 교우집에 물을 길어다 주는가 하면 아들은 짚신을 삼는일로 근근히 목숨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후재는 이러한 빈궁을 기쁜 마음으로 참아받으며 또한 기해년 정월에 어머니가 선종할때까지 항상 늙은 어머니에게 지극한 효성을 다했다. 그의 아내 안나는 아직 나이가 젊었던 관계로 이와 같이 큰 가난을 참아 내기가 어려워 가끔 불평하는 말로 남편을 괴롭히곤 했다.

그럴 때마다 후재는 고통을 잘 참아 받으라고 아내를 타일렀다.
하루는 사람이 자기 영혼을 구하려면 자기의 비천한 육신의 곤궁을 어떻게 참아받아야 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말하기를 "옛날 어떤 성인은 자기의 썩은 몸에서 구더기가 기어 나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것을 지어서 다시 종기에 더 넣으며 먹을 것을 두고 어디를 가느냐고 말했다닌 우리네 것 같은 조금한고통쯤 못 견디어 낼 것이 무엇이오"하고 도리어 반문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후재는 평상시에 교회의 본분을 충실히 이행하였고, 일을 부지런히 하여 항상, "내 영혼을 구하려면 치명을 해야해"하고 말했다. 또한 짚신 만드는 방망이로 자기 정강이를 치는고생도 하였다. 기해년 4월에 박해가 치열해지자 후재는 아내에게"교우들이 많이 붙잡혔으니, 우리도 더욱 조심합시다"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때 돈이라고는 한푼도 없었는데 큰 그릇을 40푼에 팔아서 20푼은 자기가 갖고 나머지 20푼은 아내에게 주며 마음대로 쓰라고 했다.

바로 그 날 저녁 후재는 아내더러 숙모집에 가서 하룻밤을 지내고 오라고 말하였다. 이튼날 아침 아내는 남편이 데려오기를 기다렸으나 오정이 되어도 아무 소식이 없어 그 때서야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겨 사촌오빠 치화를 보내어 알아 보게 하였더니 돌아와서 전하는 말이, 지난 밤에 포졸들이 와서 그의 남편을 잡아갔다는 것이었다.

이 때가 기해년 5월 3일이었다. 그러나 실은 자기 남편이 어떤 예비교우에게 고발당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재의 아내는 "그이는 미구에 잡힐 것을 예 감하였으며, 그래서 나를 숙모집으로 보낸 것으로 믿는다"고 증언했다.

후재는 사관청을 거쳐 포청으로 인도되었다. 종사관이 후재의 성명과 내력을 묻고 난 다음 포장이 직접 문초하기를 "배주하고 일당을 대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후재는 "죽사와도 못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에 치도곤 40대를 치니 후재의 살이 떨어지고 피가 흘러 내렸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이때 또 주리를 틀며 달래고 때리고 여러 방면으로 유인해 보았으나 그의 의지를 더욱 굳게 해 줄 뿐 아무 소용이 없었다. 뿐더러 후재는 교우와 도적들 앞에서도 주야로 그치지 않고 설교도리를 강론하였다.
후재의 처남 치화는 성교이야기를 들어 알고는 있었으나 아직 입교는 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감옥에 드나들며 그 곳 사정을 탐지해 낼 수 있었다.

하루는 후재를 보러 감옥에 갔더니 후재가 처남에게, "나는 치도곤 40대를 맞아 죽은 사람처럼 되었으나 이제는 보는 바와 같이 부활했네"하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치화는 후재의 사형집행도 목격했는데, 희광이가 후재의 목을 내리쳤으나 그의 목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희광이는 오랫동안 칼을 돌에 갈았다. 그 동안 후재의 전신은무서운 경련을 일으키며 떨었다.

이윽고 희광이가 돌아와서 그의 목을 완전히 내리쳐서 그의 순교를 완수시키니, 때는 1839년 9월 3일 장소는 서소문 밖 네거리,
그의 나이 41세였다.

후재가 형조에게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 "곧 나간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내는 처음에는 이 말을 출옥으로 잘못 알아들었으나 곧 그 참 뜻이 출문임을 깨달았다. 즉 후재는 나간다는 말로서, "드디어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곧 서소문 밖으로 나갈 것이다"라는 뜻으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