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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성인 성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영문명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40.1.31 순교 
신분 회장  지역 한국 


성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1792-1840)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이고 일명 이선이라고도 불리던 박종원은 서울에 살던 중인 계급인 교우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겸손하고 온순하며 친절한 성품에도 뛰어난 재주와 학식 때문에 모두의 칭찬의 대상이 되었다. 이미 어렸을 적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아주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한때 그는 약방의 거간 노릇을 해가며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가난으로 인해 의식이 박한 자기의 신세를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참아받으며, 한편으로는 어머니에게 극진히 효도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어머니와 한가지로 수계하며 교우로서의 모든 본분에 충실하였다.
자라서 박종원은 역시 서울 출신이고 또한 순교자의 자손인 고순이(바르바라)와 결혼하여 슬하에 세 남매를 두어 다같이 열심히 봉교하였다. 집안 사람을 교훈할 일이 생기면 자애롭게 하였다. 잠을 적게 자고 깨어 있으면서 신공과 묵상을 부지런히 함으로써 스스로 열심히 신앙 생활을 영위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의 구령에도 전적으로 헌신하였다.

교리 지식이 깊고 밝아 교우와 외교인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으며, 죽음 위험에 처해 있는 외교인 어
린이를 찾아 대세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의 결점이나 어떤 큰 과실을 보게 되면 친절한 말로 부드럽게 타일렀다. 남이 죄의 상태에 빠져있는 것을 보면 괴로와 하는 일이 얼굴에드러났다. 그의 추고는 아주 감동적이어서 그의 충고를 받아 들이지 않는사람이 매우 드물었다고 한다.

매양 좋은 일은 남에게 사양하고, 궂은 일은 자기가 앞서서 맡아서 하였다.
참으로 그의 다정함은 세간에 알려져 교우들은 웃으며,"박 아우구스티노가 골내는 것을 언제나 볼 수 있을까?"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늘 예수 그리스도의 수고수난을 생각하여, "오주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셨으니 나도 오주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예수께 서 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으니 나도 예수를 위하여 치명함이 마땅하다"고 말하였다. 이렇게 늘 치명준비에 힘썼다.

한국에 전교신부를 영접하려고 준비하고 있을 무렵에 박종원도 주야를 가리지 않고 여행을 하며 이 중대한 일에 힘자라는데까지 기여하였다. 마침내 중국인 유방제(파치피코) 신부가 입국하였고 박종원의 비상함과 열심함이 미구에 신부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유신부는 그를 내포지방에 파견하여 그곳의 교우들을 가르쳐 그들의 열성과 용기를 복돋우게 하였다.

이어 입국한 앵베르 주교도 박종원의 재능과 덕행을 인정하여 그를 서울 회장으로 임명하게 되었다.
이에 박종원은 이 중하고 위험스러운 회장직을 성심껏 이행하려고 열성을 배가하였다. 많은 외교인을 개종시켰고 주일이면 교우집을 두루 찾아다니며 모든 교우들이 성사를 타당히 받을 수 있도록 끊입없이 권면하였다. 교우들만이 아니라 외교인들까지도 박종원의 공적을 평가하고 있었으므로 기해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곧그의 이름이 드러나게 되어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박종원은 비록 피신 중이라 할지라도 위험을 무릎쓰고밤이 되면 감옥을 찾아가서 잡힌 교우들의 동정을 스스로 살피고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복돋아 주며 교우들과 서로 상통하게 하였다.

이와같은 그의 필사적인 노력의 결과 이 무렵의 순교자에 대한 세하고도 많은 사실에 후세에 길이 알려지게 되었다. 8개월 동안 피신하여 다니던 끝에 결국 10월 26일 포졸에 붙잡혔고 이튿날에는 그의 아내 고 바르바라도 잡히어 부부가 포청에서 재회하였다.
부부가 같이 고문과 문초를 받았고, 부부가 한가지로 용감하게이겨냈다.

포청에서의 박종원의 열성은 같이 갇혀 있는 이들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그래서 그들은 박종원의 얘기 듣기를 좋아했다. 하루는 포졸들까지도,"오늘 저녁엔 이선의 교리 얘기를 들으러 가자"고 말했다는 것이다. 포청에서 받은 여섯차례에 걸친 혹독한 고문으로 팔과 다리를쓰지 못하게 되었지만 박 종원은 마음이 화평하여 안색이 여전하고 열정이 간절하여 의연히 굽히지 않았다.

그러므로 10여일만에 아내와 한가지로 형조로 이송되기에 이르렀다. 형조에서도 주장이 가해지는 문초를 받아 살이 떨어지고 뼈가 드러나 유혈이 낭자했지만 종시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부부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아내가 먼저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치명하였다. 부인이 순교한 후에도 박종원은 한달 남짓 더 오랜 시련을 겪어야 했는데 그간 1월 11일과 13일 두번에걸쳐 형문을 다시 받았다.

박종원은 죽기를 맹세하고 배교를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나가서 천당 지옥이 엄연히 존재하고 제사는 헛된 예식이어서 지낼 필요가 없다고 호교도 하였다.

옥에 있는 지 4개월 1840년 1월 31일 다른 6명의 증거자와 함께당고개에서 참수치명하니 그의 나이 48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