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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박봉손 막달레나     

 

 

 

 

 

 

    

 

성인 성녀 박봉손 막달레나 

영문명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39.9.22 순교 
신분 과부  지역 한국 


박 봉 손(막달레나 1795-1839)

박봉손 막달레나는 서울 태생인데 아직 외교인으로 15세 되던 해에 시골로 시집갔으나 딸 둘을 낳고는 과부가 되었다. 이어서 시부모마저 여의게 되니 하는 수 없이 친정으로 돌아왔다. 친정에 와보니 마침 김세실리아는 훌륭한 여교우가 계모로 와있어서 결국 계모의 권고와 가르침을 받아 1834년경에 입교하게 되었다.

박 글라라는 그이 외사촌 시누이인 봉손의 사람됨과 평소의 신앙생활을 회상하면서 "시누이는 원래 굳센 성격이었으나 겸손하고 인내할 줄도 알고 천주님과 이웃에 봉사하는데 아주 열성적이었다. 견진도 받았고 해마다 두번씩 규칙적으로 고해성사를 보고 성체성사를 받았다. 나도 시누이에게서 성체문답을 배웠다"고 말하였다.

친정으로 돌아온지 얼마 안되어 외삼촌 김사문의 곁방살이를 하게 되었다.
김사문은 계모의 오라버니였다. 곁방살이의 신세가 얼마나 고단하고 비참했을 것인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집은 작은데다 가난한 사람, 늙은이 어린이 10여명이 동거하고 있었으므로 마치 장바닥처럼 시끄럽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게다가 교우들의 왕래가 잦고 보니 번잡함이 그지 없었다. 그러나 봉손은 그런주에도 궂은 일을 자기가 도맡아하고, 쉬운 일은 남에게 사양하였으며, 번잡한 중에서도 즐거워 하여,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으며, 도리어 영상에 있어서 자기의 본분을 소홀히 할까 두려워 할 뿐이었다.

이처럼 그의 애주 애인하는 열정과 마음속의 빛나는 덕행은 실로 측량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입교한지 불과 5년만에 박해를 맞게 되었을 때, 아직 외삼촌과 함께 남대문밖 이문골에 살고 있었는데 집안 사람은 모두 피신했으나 봉손은 혼자 집을 지키며 포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4월 중순경 외삼촌이 마침 집에 들르게 되니 포졸들이 달려들어 외삼촌과 봉손을 함께 잡아갔다.

봉손은 오라로 묶여 포장 앞에 끌려나와 첫번째 문초를 받았다.
"배교하고 집사람들이 간 곳을 대라. 그리고 책과 동교인들을 대지않으면 심하게 때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배교는 할 수 없고 집안사람은 저도 모르게 피신하였은 즉 그들이 간 곳을 알 수 없으며, 동교인과 책에 대해서도 아는 바 없나이다"

그러나 포장은 피신한 사람들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형벌을 더하고 주리를 틀게 하고 나서, "네 집에 왕래한 사람이 많은 줄로 알고 묻는 것인데 어찌 모른단 말이냐?"고 캐물었지만 봉손은 혹형중에서도 침착하게 "과연 어떤 사람이 내왕했는지 모릅니다"라고대답할 뿐 아무도 고발하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된 후에도 형관이 이제라도 단념하면 놓아 주겠다고 또 한번 달랬으나 봉손은 "단념하려 했으며 벌써 포청에서 놓였을 것인데 여기까지 온 것은 위주 치명하고자 함이니 국법대로 죽여주십시오"하고 다시 묻지 말라고 대답할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않았다.

옥고생활 6개월만에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1839년 9월 26일 참수치명하니 그의 나이 44세였다.
그의 올케는 봉손이 형장에서 세번째 칼에 쓰러졌다는 증언을남겨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