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다블뤼(안토니오 1817-1866)
한국명 안돈이인 안토니오 다블뤼는 1817년 3월 16일 프랑스 아미앙이란 고장에서 가장 신임을 받으며 고을을 위해 큰 역할을 하고 있던 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845년 10월 12일에는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조선에 와서, 다음날 이 세 사람은 의심을 살까 두려워 서로 헤어졌다.
그래서 다블뤼 신부는 한 교우의 안내를 받아 산골에 피신해 있다가 1846년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처음 두달동안 7백여명의 교우들을 돌아보면 많은 이들에게 성체성사를 주는 등 실로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 얼마 후 페레올 주교를 찾아 방문하여 이곳에서 며칠을 지내고 있는 사이에 1846년
병오년 박해가 일어났다. 이때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체포되어
9월 16일 한강변 새남터에서 순교하게 되자 안토니오 다블뤼 신부는 다시 페레올주교와 작별하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정이 급하여 습기가 심한 불결한 방에 숨어 살아야만 했던 다블뤼 신부는 앓기까지 하였다. 실로 그는 상류가정에서 자란 관계로 조선 풍속에 익숙하기가 퍽 어려웠던 것이다.
여하간 이때는 다행히도 서양사람들이 입국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다블뤼 신부는 다음해부터 다시 전교활동
계속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블뤼 신부는 2년동안 1,700여명의 영세자를 내면서 외교인에게 천주교가 무엇인지를 소개하여 줄 수
있었다.
한편 숨어서 살아가는 그의 생활이 너무 어려웠던 관계로 그의 건강은 점점 쇠약해지고 위병까지 생겨 심한 고통을 계속 받고 있었다. 그후 병이 악화되어 1850년에는 생명이 위험까지 있게 되니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 신부에게 쉬라는 명령을 내려 신자 가정방문은 완전히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 금하였다. 쉬는 동안 다블뤼신부는 집에 앉아 신학생 소년들을 모아 라틴어를 가르치고 <한불중사전>을 편찬하여 또한 <신명초행><영세대의>등 많은 책을 번역하였다. 그리고 이때는 아니었지만 후에 10여년전에 걸친 각고끝에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순교자 비방기>를 만들어 내는 큰 업적을 이룩했다.
1853년 2월 3일에는 페레올 주교가 선종함에 따라 메스트로신부가 교구장 서리에 임하고 다블뤼 신부는 서울 남쪽 산기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856년에 2월 베르뇌 주교를 맞게 되니 다블뤼 신부의 기쁨은 이를 바 없이 컸었다. 베르뇌 주교는 입국하자 마자 즉시 다블뤼 신부를 자기 부주교로 선정 임명하고 1857년 3월 25일 밤 서울 장안 어느 교우집에서 비밀리에서 주교품을 준 다음 이어 최초의 조선성직자 회의를 주관하게 되었다.
이 회의를 통해 성직자들은 조선의 전교문제를 서로 상의하고 그 활동방안을 세밀하게 검토하였다. 한편 다블뤼 부주교의 지칠줄 모르는 활발한 선교는 곧 조선 천주교 발전현황을 뜻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는 일하기 가장 곤란한 지방들을 자원하여 돌봐가면서 귀중한 출판사업에도 착수하여 교회사를 펴 내었다.
다블뤼 부주교는 또한 신앙생활과 신심생활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간파하는 한편 자기가 먼저 솔선수범하여 다른 이들에게
좋은 표양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얼마 후 1866년 2월 23일 베르뇌 주교가 잡혀 3월 7일 참수치명하게 되자 이때부터 다블뤼 부주교는 23일간 비록 짧은 기간이나마 조선 제5대 교구장으로 일을 맡아 보았다.
1866년 3월 11일 포졸들이 홍주 거더리마을 이씨 집으로 달려왔을 때 이곳에는 다블뤼 주교와 그의 복사인 황석두(루가)가 있었다. 당시의 한 목격자는 다블뤼 주교의 체포경위를 다음과 같이후에 진술했다.
"이곳에 다블뤼 주교가 있다는 정보를 듣고 달려온 포졸들은 먼저이 고을 원님을 찾았다. 원님 역시 교우였는지라 서양 사람들이
있다는 밀고를 받고 왔다는 포졸들의 말에 그럴 리가 없다면서 부정하였다. 그러나 포졸들은 원님말을 신용하지 않고 마을 집들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때 다블뤼 주교는 복사를 보내 상황을 알아본 후 복사더러 포졸들을 불러오라고 명했다.
포졸들이 이르자 다블뤼 주교는 태연하게 들어오라고 말하면서 그들앞에 선뜻 나섰던 것이다. 마침 그때는 다블뤼 주교가 교우들의 명단을 다 없애버린 다음인지라 마을엔 별다른 일이 없었고 단지 다블뤼 주교만이 며칠동안 포졸들의 감시속에 감금되었다.
3월 14일 위앵 신부와 오메트르신부가 잡혀오자 이윽고 포졸들은 이 세 사람을 서울로 압송하였다. 처음에는 이들은 결박하거나
나쁜 언동을 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3월 19일 서울 가까이 와서부터는 죄수복을 입게 하고 붉은 포승으로 어깨를 결박한 다음 목에 쇠사슬을 걸치게 하고 머리에는 삿갓을 씌웠다. 일행이 신창에 이르렀을 때 다블뤼 주교는
자기를 밀고하여 체포케 한 후에는 감옥에 끌려가 투옥된 자의 이름을 대면서 그를 풀어주라고 부탁하여 후에 자유를 누리게 해주었다.
어떠한 질문을 받든지 다블뤼 주교는 죽음을 전혀 겁내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하면서 기어이 교우들을 한사람도 대주지 않았다.
마침내 3월 23일이 되자 대원군은 임금에게 다블뤼 주교와 두 전교신부들을 사형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상소함으로써 임금은 그 상소를 윤허해 주었다.
그러나 사형장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보령땅의 수영 갈매못으로 결정되었다. 사형장이 바뀌어진 이유는 두가지였다. 첫째, 그때
임금이 미령하여 누워있었는데 여러가지로 수소문해본 결과 신부
주교를 서울에서 피를 흘려 죽이면 뒤끝이 좋지 않다고 해서 두려
워했던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궁내에서 고종임금의 가례(결혼)를
치러야 했는데 서울 땅에서 피를 흘리게 되면 후사가 좋지 못할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선교사들은 죄수복을 입고 고문으로 인해 상한 다리를 질질 끌면서 말에 실려 사형장으로 이송되었다. 그런데 압송되는
도중 3월 20일 바로 성 목요일 다음날로 정해져 있는 사형이 연기
될 우려가 있음을 알아차린 다블뤼 주교는 즉시 포졸들에게 남은
기력을 다하여,
"성 금요일 내일 죽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 결과 다블뤼 주교의 간청이 받아들여져 성 금요일 이들은 행렬을 지어 정해진 사형장으로 향하였다.
사형장에 도착하자 규칙에 따라 포졸들은 주교 신부들에게 무릎을 꿇어 포도대장한테 절을 하라고 강요하였다. 이때 다블뤼 주교는 이를 거절하고 간단하게 서양식으로만 인사하고 말았다.
마침내 정해진 절차들이 끝나자 곧 이어 처형이 시작되었다.
이 때의 형장은 갈매못은 수영에서 약 10리 떨어진 보령지방의 강가인데 순교장면의 목격자인 이 힐라리오는 "포졸들이 맨먼저
주교를 칼로 쳤다. 목이 완전히 베어지지 않고, 반만 잘렸다. 주교는 한번 크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렇게 망나니가 목을 반만 벤 다음 수사에게 자기의 수고값으로 400냥을 요구했다. 수사는 주겠다고 승낙했다. 다시 다블뤼 주교에게 와서 한번 목을 치니 주교의
목이 몸에서 완전히 떨어졌다"고 전했다. 다블뤼 주교의 그때 나이는 49세였다. 그는 그렇게도 한국퐁숙에 적응하기 어려운 것을 극복하고 우리말도 잘했으며 보신탕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이었다.
그는 입국하여 신부로 12년 보좌주교로 9년 실로 20여년간 이 땅의 양떼를 위해 봉사하다 마침내는 순교의 영광까지 누렸다.
그의 시체는 군문효수의 극형으로 처형되었으니 3일 목을 매달고 있다가 그후 사형장 한구석에 묻었다. 그러다가 훨씬 후 교우들이 홍산땅으로 옮겨서 정중히 안장하였다.
지금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