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남종삼(요한 1816-1866)
서울에서도 산 일이 있는 남종삼(요한)은 1816년경에 충주지방의 제천에서 태어났으며, 일찌기 충주 의원을 지내고 1827년에 북겨에서 영세 입교한 통정대부 남상교 아우구스티노의 양자이다. 그의 아버지 남 아우구스티노는 여러 가지 중직을 신앙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 거절하며 살았다.
그런데 쉽게 신심생활을 익힌 남종삼은 한편으로는 용감하게 신앙생활을 잘해 나갔지만 또 다른편으로는 일반 사회에서 출세하고싶은 소망이 컸었다. 실제 그는 26세 때에 홍문관 교리에 급제한뒤 이어 39세 때에는 경상도의 현감이 되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신자로서 관의 일을 맡아보려면 여러 가지 장애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 남종삼도 국정의 공적 의식에 참여할 때마다 그것들이 조상숭배인 이상 미산성격을 띤 일에 간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또한 그이 생활에 있어서도 기생들과 어울리지 않을 수가 없는 때가 자주 있기 때문에 올바른 그의 신앙생활에 많은 지장을 초래했던 것이다.
남종삼은 이 때에 재물과 부녀자를 멀리하며 의덕과 정결과 가난 가운데서 모범적인 관리생활을 함으로써 교우들에겐 존경의 대상이 되고 한편 동료들에겐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겸손의 덕은 뛰어났지만 자기의 훌륭한 가문과 높은 벼슬깊은 학식에도 불구하고 "교우이건 종이건 다 천주한테 조성되엇지, 천주대전에 누가 양반이 될 수 있는가. 그러므로 교우 중에 양반이란 있을 수 없어."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는 이렇게 백성의 아버지 노릇을 하고 교우본분을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몇 사람을 개종시키고 그리고 꽤 칭찬받을 만한 일은 수령을 모시고 술자리 베푸는 일엔 으례 그가 빠져서 각고을에서 양성하던 관리들의 조소를 산 일이엇다. 그는 한번도 그들을 부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교우의 본분을 지키면서도 당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미신행위였지만 한때 그것을 피하기힘들었다고 한다.
한편 남종삼으로서는 자기직책을 버릴 수 없던 큰 이유 중의 하나가 가까운 데서부터 먼 친척에 이르기까지 전 가문의 생계를 꾸려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종삼은 절대적 미신성격을띠지않은 공적 의식만을 참여하려고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현감직무를 통해 모든 이에게 정의를 지켜주고 곤경을 당하는 가난한 자들과 천민들을 보호해 주며 선정을 베풀어 다른 이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몇 년 후 마침내 퇴직하여 가정에 돌아와 가사에 종사하며 성체성사 등 신앙생활에 열중하고 선교사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쳐 주면서 살아갔다.
그 뒤 1863년에는 가사가 어려워져 생계를 돌보아야 할 불가피 일이 생김에 따라 남종삼은 다시 서울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그는 승지가 되어 왕궁에 머무르면서 대신들의 자녀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기에 이르니 따라서 대원군과 자주 대면하게되었다.
그러던 중 1866년 러시아의 배 한척이 아니라 함경도 국경을 넘나드니 모든 사람이 다 겁을 먹고 당황하게 되어 대원군을 비롯해
모든 대신들은 어떻게 하면 발등에 떨어진 이 위험을 모면할까 하여 고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들은 이미 북겨에 와 있는 프랑스사람들과 영국 사람들이 소련사람들을 몰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외국인들을 어떻게 입국시키는 것이냐는 것이었다. 이런 때에 천주교인들에게 대단히 협조를 잘 해 주던 대원군 부인 민씨가 나서서 한국에 이미 프랑스 선교사들이 와 있는줄로 안다고 말하면서 천주교 신자인 승지 남종삼을 불러 의논하면 베르뇌 주교를 통해 북경에 있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의뢰할 수있을 것이라고 암시했다.
이리하여 대원군은 승지 남종삼을 불러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나눈 후 장주교를 대궐로 모셔다가 그분에게 이일을 맡기자고 하였다.
이 사실을 미루어 일단 한국 교우들에게 잠시나마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남종삼은 장주교를 찾아 나섰을 때는 이미 베르뇌 주교가 서울을 떠난 직후였다. 그래서 며칠 후에야 다시 장주교가 평양에서 서울로 돌아오니 이 때는 이미 소련인들이 물러갈 때인지라 침략 위험이 저절로 사려져 버린 훨씬 후였다.
선비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즉 이들은 대원군이 득세파에게 행동자유를 주어 천주교의 힘이 대궐 안에까지 뻗치게 했던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대원군이 했던 일을 취소시키는 한편 소련의 침략으로 잠시 겁을 먹고 늦추었던 천주교 박해를
다시 내리도록 임금에게 탄원했다.
이로 인해 3월 1일 남종삼이 체포된 이유는 천주학을 따른다는 것이외에 남종삼과 홍봉주가 함께 대원군에게 제출한 청원서 때문이었다. 그 청원서에는 당시 러시아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장주교의 힘이 작용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었다.
남종삼은 고향 묘재에 과세차 내려갔다가 자기 자신의 체포도 시일문제임을 깨닫고 제천의 배론학당을 찾아가 고해, 영성체로서
순교의 준비를 하는 한편 상경 중 장주교의 체포소식을 듣고 고양으로 피신하였으나 이선이의 밀고로 고양군의 한주막에서 서울 포졸들에게 잡히어 가마를 타고 서울 좌포도청에 압송되어 얼마동안
그 곳 감옥에 갇혔다가 의금부로 옮겨지니 거기서 장주교와 다른
신부들을 만나게 되었다.
남종삼은 문초 중 다른 교우들을 대라는 말에 "그런 말은 두번다시 거듭하지 말라"고 딱 잘라 대답할 뿐이었다.
또한 앞무릎에 30대의 곤장을 맞았으나 말없이 용감하게 참아받았다.
3월 4일과 5일에는 심한 고문과 곤장을 여러 번 당했다. 그리고 6일에는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죄목으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남종삼에 대한 사형선고문의 몇 귀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서양학문이라고도 하는 이것은 사악한 잡교로서 아버지 어머니
몰라보고 임금도 몰라보는 종교로다. 또한 이는 나라의 벼슬까지
누리는 자로서 전심으로 이 교를 숭상하고 다른 이들에게 퍼뜨려
오래 전부터 크게 해를 끼쳐 왔도다. 정도에 위반되는 사교를 오히려 정도라고 고집하였으니 참수해야 마땅하다.>
드디어 1866년 3월 7일 남종삼은 서소문 밖 네거리에 있는 사형장에 끌려가 용감하게 참수치명하니 그의 나이 50세였고, 그는 예수마리아를 계속 부르다가 병졸이 내리치는 첫번째 칼에 목을 떨어뜨리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체는 3일 후 정중히 안장되었다.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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