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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성인 성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영문명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39.9.22 순교 
신분 회장  지역 한국 


성 남이관(세바스티아노 1779-1839)

명망높은 가문의 후예이며, 또한 교우 부모에게서 4형제중 막내 태어났다. 열네살 때 일찌기 모친을 여의고 18세에 조 프란치스코의 딸 바르바라와 결혼하여 슬하에 한 아들을 두었으나 얼마 안되어 죽었다.
1801년 신유년에 박해를 당하여 그의 부친 남 필용이 잡히어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나, 신앙을 고수한 결과 유배되었고, 곧 유배지에서 선종하였다.

이때 남이관은 처가로 피신하였으나 결국 잡히여 경상도 단성으롤 유배되었다. 여기서 그는 그의 나이 50세가 넘을 때까지 무려 30년간의 귀양살이를 해야 했고, 그래서 1832년에야 겨우 귀양살이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그의 아내 바르바라는 남편이 정배되자 하는 수 없이 이천의 친정으로 내려가 동생을 데리고 살았다.

단성은 교우가 없는 지방이어서 남이관은 교리를 배우지 못하였고, 아침 저녁으로 겨우 주모경을 외우는 것응로 그쳤다. 그러는 동안 차차 냉담하게 되고 심지어는 첩까지 얻어 자식까지 낳았다.그러나 그것이 중한 죄라는 것은 조금도 알지 못하였다.
이관의 나이 약 50세가 되었을 무렵 중병에 걸렸을 때 이웃 지방에 귀양온 교우로부터 교리의 가르침을 받아 첩을 멀리하고 대세를 받은 뒤부터는 교우다운 생활을 하였다.
그후 5-6년 만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우선 과천의 처가로 와서보냈다. 처가는 정하상과 외척간이었고, 이런 인연에서였는지는 확실치않으나 여하간 이관은 이때부터 하상과 더불어 신부 영접하는 일을 도모하였다.

1833년 말 중국인 유신부가 입국하게 되자,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하상과 함께 의주까지 가서 신부를 영접하였고, 신부가 입국한 후로는 서울에 교회집을 마련하고 집주인 노릇을 하며 신부에게 봉사하였다.
신부로부터 세바스티아노란 세례명으로 영세하고 견진까지 받았다. 신부를 위해 모든 의무를 맡아 보는 한편, 염경과 묵상을 독실히 하였다. 그 후 유신부가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세바스티아노는 서울에 집 한채를 따로 마련하여 아내와 딸과 함께 지냈다.

기해년 박해시초에 남이관은 무서워서 그랬는지 시골 교ㅇ르을 격려하러 갈 생각으로 서울을 떠났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너무도 유명하여 수색의 그물을 빠져 나기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신변에 닥칠 위험을 예측하고 진천을 거쳐 이천으로 피신하였다.
그해 6월 9일 포졸이 남이관을 체포하러 왔으나 그를 잡지 못하고 그의 부인과 15세의 딸만을 잡아 갔다. 동시에 그의 집에서 많은 성화, 성서, 성상이 발각되어 압수되었다.

한편 시골로 피신한 남이관도 잡힘을 면치 못할 줄 알고 치명을 예비하며 기도로써 장차 당할 옥중의 고통을 견디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결국 한 교우가 포졸을 데리고 가서 그를 체포한 곳은 이천고을'금죄'라는 곳이었다.

8월 10일 남이관을 체포하자 서울로 압송해 왔다. 포청은 그가 심상한 천주교인이 아님을 알고 즉시 형조로 이송하였고, 이어 김제준과 함께 의금부포 보내어져서 여기서 유진길, 정하상 등과 함께 국문을 받게 이르렀다.

이튼 날, 8월 13일의 국청심문에서 그는 부친이 천주학을 한 까닭으로 이를 배우게 되었으나 신유년 이래 30년 동안을 폐기하였다가  5,6년전에 비로소 집에 있는 십계에 관한 책과 기카 서적을 보고 그 요지가 심히 좋아서 아내와 한가지로 강습하게 된 것이라고 그의 봉교 경위를 상세히 자백하였다.

다음 선교사 영접에 관하여 그는 그로 인하여 성교가 널리 퍼질수 있으므로 다행한 일이라고 하였고, 또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해서는 안될 이유를 이렇게 용감히 논박하였다.
"나라의 금하시는 바는 도의 본지를 살피지 아니하신 것이니, 제가 본 바인즉 스스로 옳다고 하는 까닭이올시다. 대저, 부모의 명령도 옳은 것이 있고 옳지 않은 것이 있은 즉국가의 금하는 영도 또한 마땅히 옳은 것도 있고 옳지 않은 것도 있을 것이오니 국가에서 그 옳고 옳지 않은 것을 분별하여 금하였은즉 제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이어서 남이관은 천주교가 옳다고 생각되는 두가지 사실은 하나는 천지의 주제를 존중하는 것이요. 하나는 사람 사랑하기를 자기 몸같이 하는 것임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다.
국관은 의금부에서 형문 한번에 곤장 7도를 맞았다. 이틀에 걸쳐 심문을 끝낸 국청은 남이관은 그 정절이 심히 흉악하나 유가와 정가와는 조금 다르다고 결론하고 형조로 돌려보내 의법처단키로하였다.

드디어 8월 15일 형조는 남이관에 대하여 소위 사서를 강습하여일심으로 고혹하였으며, 죽어도 뉘우치지 아니하니 당일로 서소문 밖에서 부대 시참에 처한다고 결안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처형은 4일간이나 연기되었고, 그래서 8월 19일(9월 26일) 위의 한가지로 참수치명하니 남의관의 나이 60세였다.

형장으로 나가는 수레를 타게 될 즈음에 남이관은 환희용약하며한 군사에게 옥중에 있는 자기 아내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여 말하기를 "동일동사 하자 하였더니 이는 못하여도 동지동사나 하자"고 하였다.

과연 3개월이 지나 그의 아내 조 바르바라도 서소문 밖에서 참수치명하니 비록 동일에는 못한다 하더라도 동지(서소문밖)에서나 마 치명하자는 그의 소원이 성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