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ning: include(/home/suwons/public_html/bbs/outlogin.php) [function.include]: failed to open stream: No such file or directory in /home/suwons/public_html/103/f-6-21.htm on line 4

Warning: include() [function.include]: Failed opening '/home/suwons/public_html/bbs/outlogin.php' for inclusion (include_path='.:/usr/local/php-5.3.28/lib/php') in /home/suwons/public_html/103/f-6-21.htm on line 4
성 남경문 베드로   

 

 

 

 

 

 

    

 

성인 성 남경문 베드로  

영문명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46.9.20 순교 
신분 회장  지역 한국 


성 남경문(베드로 1796-1846)

남경문 베드로는 서울의 중인계급 가난한 집안사람이었다. 그의아버지는 1801년 전부터 천주교인이었으나 너무 일찍 새상을 떠나 그에게 신앙을 전하여 주지 못하였다. 경문이 나이 스무살이 되었을 때, 교우처녀 허 바르바라와 결혼한 것이 그가 천주교를 알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 박 베드로라는 교우로부터 입교의 권고를 받고 개종하여대세를 받고 수계하기 시작하였다. 아직 한국에 신부가 없었던 때 였다. 남경문은 금위영의 군인으로 근무하는 한편 조그마한 식료품 장사를 했다.
또한 그의 딸 데레사는 아버지의 생계를 위하여 비싼 이자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인 유신부로부터 교회가 그러한 고리대금을 금하고 있는 사실을 비로소 알고 즉시 이자놀이를 그만두고 그간 받은 이자도 힘껏 보상하였다.

유신부로부터 회장에 임명된 후로는 유신부가 성사를 주기 위하여 지방교우들을 방문하러 다닐 때 따라다니며 복사하였다. 기해년 박해 때 외교인 형제들의 도움으로 체포를 겨우 모면했다고 하기도 하고, 일단 잡히긴 했으나 외교인 형제들의 덕택으로 풀려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어쨌든 박해가 그친후로 경문은 점차 냉담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여교우를 첩으로 거느리고 그 사이에 애를 낳는 등 타락한 생활을 3년이나 계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신부를 만나 진심으로 회개하고 성사를 받은 후에는 첩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자신이 낳은 자식들의 부양비를 책임질 것도 약속하였다.

방탕하였던 과거를 속죄하기 위하여 매일 아침새벽에 일어나 오랫동안 기도를 하며 보속하는 뜻으로 한겨울 동안을 불을 때지 않고 지냈다. 서울같이 추위가 대단한 지방에서 이러한 고행을 하였으므로 그로 인하여 몸이 쇠약해지게 되었는데 그는 이것을 오히려 천주의 특별한 은헤라고 하며 기뻐하였다.

경문이 이렇듯 속죄하는 것을 보고 교우들이 경탄해마지 않았다. 또 경문 베드로는 친구들에게 늘 이런 말을 하였다. "지난 날 이렇게 행동한 내가 천당에 가려면 치명하는 길밖에 없다"
남경문이 천주교인이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는데 드디어 김신부가 잡힌 후 1846년 7월에 남대문밖 자기집에서 잡히었다. 잡히리라고 짐작은 했지만 그는 피하지 않고 있었다.

잡히기 전날 그의 딸 데레사가 친정에 왔는데 즉시 돌아가라고재촉하므로 영문도 모르고 그날 저녁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새벽 포졸들이 경문을 습격했다. 포졸들이 경문을 체포하자 아내가 그의 옷소매를 붙잡고 "난 어떻게 살란 말이오"하며 눈물로써 애원하였다.

그러나 경문은 "이제 끝장이다.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소"하고 아내를 뿌리쳤다. 포졸들이 경문을 붙잡아 좌포도청에 가두었다. 포졸이 다시 와서 그의 어머니와 아내도 잡아가는 동시에 집과 가산을 몰수하였다.

포도청 감옥에 갇혔을 때 그 형제 하나가 그를 만나보러 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화고 돌아가 음식과 옷을 들여보냈다. 그러나 경문은 "옥안에서 얻어먹는 음식과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내게는 너무나 과하니 다른 것을 더 가져올 것 없다"고 이르게 하였다. 또 어떤 증인의 말에 따르면, 동생이 찾아오면 혹 그로 인하여 타락하지나 않을까 하여 찾아오지 말라고 청하였는데 동생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또 찾아왔다. 그러자 경문은 그에게 말도 건네지 않았다.

한번은 문초 중 허리춤에서 군사의 패를 떼어 포장에게 바치며말하였다. "나는 천주께서 창조하신 물건으로 오늘까지 살아왔고 또 나라에서 쌀도 많이 받아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죽는 길박에 없으니 군사의 패로 도로 바칩니다."
"네가 배교만 하면 살려 줄 뿐만 아니라 네 직업도 잃지 않게 해주마"하고 포장이 약속하였으나 경문은 듣지 않았다.

이에 포장이 명하여 곤장으로 때리는데 어찌나 혹독하게 쳤던지어깨위에서 곤장이 부러져 나가기까지 하였다. 그 후 군인친구 열명 가량이 찾아와서 천주교를 배반하여 자유백방되어 나오라고 간절히 권하였으나 그들의 말을 통 귀담아 듣지 않았다. 친구들은 나중에 이런 말을 하였다. "그와 같이 친절하고 성실한 사람이 천주학에 그렇게까지 미혹될 줄은 도무지 생각도 못하였다. 거기서 끌어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도무지 소용이 없었다."

교우들을 고발하라고 재촉하니 그는 죽은 사람 이름을 몇 마디 댈 뿐이었다. 형리들은 양손목을 잡아매어 공중에 매달고 채찍으로 마구 갈겼다. 그러나 경문은 모든 것을 다 잘 참아 견디었다. 마침내 1846년 9월 20일 교살되어 순교를 달성하니 그의 나이50세였다.
달레에는 40세로 되어 있으나 50세로 보는 그의 딸의 증언이 보다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