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김효주(아녜스 1815-1839)
김효주 아녜스와 언니 효임 골롬바는 그들보다 먼저 성녀품에 오른 아녜스 비비안나라고 불리울만큼 과연 그들 순교는 가히 한국 교회가 낳은 가장 장한 순교였다. 전에 언니 효임 골롬바에 대해 서술한 바 있어 출생과 투옥기 등은 거의 같으니 그 중에 약간
빠진 것만 써볼까 한다.
효주와 효임은 어머니가 이 자매를 임신할 때마다 문고리에 달린 거문고를 꿈에 보았고 또 그 기묘한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1815년 출생한 효주는 언니 효임과 같이 중국인 유파치피코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한편 아버지는 천주교 이야기를 전혀 들으러 하지 않을 뿐더러 집안에서 이를 엄하게 금했다. 또한 부인과 딸들에게 미신 행위를 강요하므로
그들은 그때마다 몸을 피하여 절대로 복종하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는 절망한 나머지 패가만신 할 것이 두려워 이웃과 다투다가 스스로 목을 졸라 목숨을 끊기에 이르렀다. 효주는 천성이 온순하고상냥했으며 그의 온순한 모습은 외모에도 역력했다. 입교한 지 얼마 안되어 벌써 효주의 아름다운 표양에 탄복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의 집은 본시 부유했으나 효주는 언니 효임과 더불어 전혀 재물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다만 열심수계하는데 전념했다. 효주는 묵주를 직접 만들어서 묵주가 없는 교우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처럼
그들은 가난한 교우들에게 많은 애긍을 하였고, 또한 그들은 그것을 그들의 본분으로 여겼다.
때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어쨌든 효주의 일가는 그사이 밤섬에서 고양 땅 용머리로 이사하여 오라버니댁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기해년의 박해가 점차 치열해져 사방에서 교우들이 체포되었다. 마침내 5월 3일 포졸들이 아는 사람을 데리고 와 안토니오의 집을 포위하였다. 모두 피신하고 효주와 언니 효임 그리고 3살된 어린 아이만이 체로되었다. 이들은 일단 마을의 이장에게 인도되었다가 어린아이만을 남겨둔 채 효임과 효주만을 서울포도청으로 압송했다. 체포 당시 포졸들이 동생 효주에게 몹시 심하게 굴자, 효임은 "당신들이 우리를 잡아가면 따라 갈 것이다. 하지만 왜이렇게 거칠게 군단 말이오?" 하고 용감하게 포졸들을 꾸짖었다.
포청에 온 효주는 언니 효임과 함께 모진 고문과 혹형을 받았는
데, 하루는 형리들이 효주를 외딴 감방으로 끌고가서 학춤이라는형벌을 가하였다.
이 형벌에 대하여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것은 죄수를 발거 벗기고 손을 뒤로 결박지우고 팔을 공중에 달아매고 네 사람이 번갈아 가며 매질을 하는 것이다. 몇분만 지나면 혀가 빠져 나오고 입에 거품이 고이며 얼굴빛은 검붉어져서 죄수를 내려 쉬게 하지 않으면 곧 죽어버리는 형벌이다. 그래서 조금 쉬다가 그같은 형벌을
가하곤 했다. 형리들은 효주가 일찌기 들은 일이 없으리만큼 혹독히 때리며 여러 가지 조롱과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효주는 더욱 더 열심히 자기의 고통을 천주님께 바치며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때론 형벌을 중지시키고 달래보기도 했으나 효주는 "천주대전에 가기 위해 나를 빨리 죽여주십시오"이렇게 간청할 뿐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형조에서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자기 자신이 당하는혹형에다가 언니 효임이가 겪은 형벌은 본시 그것이 남이라도 차마 듣고 보기 어려울 것이었지만 효주는 이 혈육에서 고통까지도달게 참아받았으니, 과연 그의 온순함은 저 무서운 고문이나 죽음보다도 더욱 강했었다. 드디어 1839년 9월 3일 옥에 있은지 4개월만이며 언니 보다는 23일 앞서 타 순교자 5인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하니 동정. 순교자란 두 가지 승리의 월계관을 차지하였다. 그의 언니 베네딕타는 그 당시 효주의 나이 24세였다고증언하였다. 기해년 박해시 김 골롬바와 김 아녜스가 주님을 위해동정을 지키고 순교한 사실은 너무나 진실하고 값진 것이어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으며, 오늘의 신자들에게 널리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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