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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3위성인

 

 

 

 

 

 

    

 

聖 권득인(베드로 1804-1839)


권득인 베드로는 일명 '성도'라고 불렸는데 그이 정식 이름이 '득인'인 것으로 보아 성도는 그 자인 듯하다. 원래 서울 문안 태생이다. 일찌기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고, 이어 그가 열 여섯 살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여의었다.

어머니가 열심한 교우였기 때문에 권득인도 일찍부터 어머니의 좋은 표양을 따라 열심히 봉교하였다.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 얼마 안되어 결혼하였고 그 후 약장사를 하는 형 프란치스코 집에서 한 때 같이 지냈다.

그 후 '사직골'에 거처하면서 조그마한 장사를 하며 가난한 살림을 꾸려 나갔다. '너리골'로 이사혼 후부터는 고상과 패를 만들어 팔아 생계를 삼았다. 바로 이 '성패'때문에 그가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에 대한 판결문에 "그가 여러 해 동안 사학을 강습하여 자수로 사구를 만들어 널리 흉도에게 전파하였으니 위법처단 하겠습니다."라는 그의 죄목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또한 남의 일을 돌보는 데 진심으로 전력하였고 이로 인하여 오는 어려움에 개의치 않고 마치 그것이 자기의 소임인 양 생각했으므로 모두가 그의 치밀하고 성실한 봉사에 탄복하여 마지 않았다고들 한다.

권득인과 그의 가족이 잡힌 것은 1839년 1월 16일의 일로서 말하자면 기해박해에 당시 제일 먼저 잡힌 가족이다. 그러므로 그의체포로 인하여 많은 교우들의 놀라움과 충격은 대단히 컸다. 이슬픈 소식은 곧 수원 갓등이를 방문 중이던 앵베르 주교에게 전해졌다.
앵베르 주교는 인천으로 가려던 계획을 중단하고 급거귀경했다. 마침 대목도 가깝고 하니 이 평온한 시기를 이용하여 서울의 1천여명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는 한편, 두려워하고 있는 교우들을 격려하고 안심시킬 의도에서였다.

권득인이 잡힌 경위는 이러하다 1월 16일 저녁 득인은 자기를찾아온 처남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돌연 대문을 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문 쪽으로 나가려는 부인에게 심상치 않게 여긴 득인은내가 나가겠다고 말하였다. 대문을 열자 횃불을 든 포졸들이 뜰 안으로 들이닥쳐 득인에게수갑을 채워 앉히고 나서 방으로 들어가서 득인의 부인과 처남을 향하여 "너희도 천주학을 하느냐?"하고 물었다.
그들은 묵주를 꺼내보이면서 과연 천주교를 믿노라고 대답하였다.그러자 포졸들은 그들도 잡아 득인과 함께 포청으로 압송하였다.
어린애들을 합쳐서 모두 5명이었다.

득인은 옥중생활 5개월 동안 가끔 부인과 처남에게 편지로써 같이 순교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에도 득인은 기회만 있으면 편지를 보내어 그들이 정욕을 끊고 회개하여 자기와 같이 순교하도록 권고하였다.
득인의 자부 이 아가다는 시복 수속을 위한 증언석상에서 "나는 내 눈으로 이 편지를 보았습니다. 내 시어머니는 이 편지를 읽을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그 때 배교로 치명의 은혜를 잃게 된 것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었습니다."하고 증언하였다.

포청 문초에서 포장이 "왜 천주학을 하느냐?"고 물었다. 득인은 대답하기를 "천주는 신인과 만물의 대왕이십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며 만물을 사용함으로써 천주로부터 허다한 은혜를 입고 있으니, 그 은혜가 무한한지라 어찌 보답하기를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사람은 마땅히 천주를 받들어 섬겨야 합니다."고 하였다.

포장이 크게 노하여 혹독한 형벌을 가하며 "네 형과 주교, 신부가 있는 곳을 대라"고 위협하며 재촉하였다. 하지만 권득인은 끝내 한 사람도 고발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판관은 천성이 양순하여 마지못해 교우를 체포하며, 될 수 있는데로 형벌을 아니 내리고 배교시켜 방면하려 하였다. 그는 교우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참 이상하다. 너희들이 나를 보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여야 할터인데,제발 한마디만 하고 나가라 하는데 왜 말을 듣지 않느냐?"하였다.

득인이 끝내 말을 듣지 않자 포악한 강도들에게 건네주며 마음대로 학대하라고 하였다. 그는 저들한테서 두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아니하니 곤장과 편태로 무수히 난타하여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유혈이 낭자하였다. 포졸들이 그를 아문에서 감옥으로 떠매어 가니 판관이 "이 사람아, 참말로든지 거짓말로든지 '나는 교우가 아니오'라고 말 한 마디만 하면 석방될터인데 왜 말을 하지 않나? 거짓말로 배교하고 나가서 집에서 다시 성교를 믿으면 되지 않겠나?"하였다. 득인은 말하기를 "성교는 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요. 성교를 배반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소"하였다.

형조에서 4개월 동안 기아와 추위와 무서움을 겪었다. 형리들은 득인을 강박하여 꼭 그를 배교시킬 작정이었으나, 도리어 이런 난 중에도 득인의 의지는 더욱 굳어지고 그의 열성은 더해갈 뿐이었다.  기해년 5월 24일 득인을 수레에 태워 형장인 서소문 밖으로 끌고 나갔다. 수레가 '경매골'의 한 교우집 앞을 지날 때 득인은 그 쪽을 바라보며 침착하고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혼잣말로 "이 집의 교우들이
나를 바로보고 있을까?"고 말하는 듯했다.

사실 그때 많은 교우가 이 집에 모여서 그가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결국 동료 8명과 더불어 그의 순교를 완성하니, 이때에 그의 나이 35세였고, 참수 치명 후에도 그의 용모는 웃는 모양이었다고 전한다. 증인 김 프란치스코는 그때 모방 신부가 권득인에게 대하여 한 말을 이렇게 전하였다. "마침 모방신부가 내 집에서 성사를 주고 있을 때 권득인이 체포되어 치명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모방 신부는 득인이 그의 목을 도끼 밑에 용감히 넣었다는 소식을 듣고 읏으며 전에 들인이 내 앞에 꿇어앉아 인사했다.그러나 이제부터는 내가 득인의 앞에 꿇어서 인사해야 할 차례이다"하고 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