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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제준 이냐시오    

 

 

 

 

 

 

    

 

성 김제준 이냐시오 (1795-1839)

김제준 이냐시오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고 있는 한국 교회의 최초의 신부 김대건 성인의 아버지이며, 김진후(비오)의 손자이다. 교회 내에서는 시명이라고 불리었는데 아마도 자(字)인 것 같다. 보명은 제인이라고 하며, 그는 원래 김해김씨 안경공파 가문의 충남 면천 땅 솔뫼 사람이다. 택현의삼 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백부인 한현에게 사학을 배웠다고 한다.

솔뫼에서 이름있고 유복한 이 집안이 천주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이미 제준의 할어바지인 진후 때부터였다.

처음에는 이단사망한 일에 빠져있던 김 진후가 비로소 천주교 이야기를 듣고 벼슬을 버리고 이단을 끊고 외인 친구와 절교하고 마침내 입교하게 된 것은 나이 50세에 이르러서였다. 1791년 신해년 박해에 잡히어 처음으로 용감히 자백하였으나 웬일인지 풀려났다.
그 후에도 연달아 4-5차례 잡히어 문초와 고문을 겪었고,1801년 신유년 박해 또 잡히었으나 그 때엔 불행히 배교하여서 귀양가게 되었다. 미구의 귀양살이에서 돌아왔으나 1805년 다시 잡히어 해미병영으로 압송되었다.

이번에는 신앙을 증거하였으나 그를 처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석방하지도 않고 그대로 옥에 가두어 두었다.

한편 그는 감옥에서 허다한 괴로움을 감수해 내며 공공연하게 열심히 수계하였다. 결국 옥에 있은 지 10년 만인 1814년 74세를 일기로 파란많은 일생을 옥에서 마쳤다.
이와같이 할아버지가 직접 순교까지 하였으나, 제준이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영향을 준 것은 할어버지보다는 오히려 그의 큰아버지였다.

사실 김제준은 그가 입교하게 된 것이 큰아버지였음을 거듭 자백하고 있다.
그러나 김제준 자신의 초사를 믿는다면, 그가 신앙생활에 적극성을 띠기 시작한 것은 선교사가 입국한 뒤 그를 직접 찾아온 후였다.
선교사가 입국하기 시작한 1835년경에 이미 김제준의 일가는 솔뫼를 떠나서 경기도 용인으로 이사와 살고 있었다.

동기인 즉 정해 박해를 피해 공향에서 수계하기가 어려워져서 보다 자유롭게 천주님을 믿기 위하여(용인골 배매실로)산중을 택하게 된 것이다.

이어 아버지 김택현이 사망하게 되자, 김제준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처자와 한가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갔다.

그러던 중 서양 선교사가 나오서 정 하상의 집에 유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샤스탕 신부를 찾아보고그에게 이냐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성세와 견진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회장의 직책을 맡아보며 교우를 열심히 권면하여 가르쳤다.
김제준은 곧고 성실한 성격에 육체적으로도 건강하게 태어나 5-6명의 장정들도 능가할 만큼 기운이 센 장사였다고한다.

1836년 초에 나 신부가 남부 지방으로 내려가는 도중 김제준의 집(은이공소)에 들르게 되었다. 이 나 신부는 김제준의 아들 15세인 재복(김대건)을 보고 그의 제자로 삼기를 원하는 고로 기꺼이 바치게 되었다.

그 후 나신부는 김재복을 장차 신부로 만들고자 그를 멀리 마카오로 유학시키게 되었다. 김제준이 잡힌 것은 기해년 1839년 9월 상순이었다고 전해질 뿐이며 그 날짜는 확실치 않다.

진천 지방으로 내려갔던 포졸들이 돌아오는 길에 용인에들려 그를 잡아 서울로 데려왔다고 하는데 유다스 김순성이 김제준의 집을 모르므로 먼저 잡은 김제준의 사위 곽씨를 앞세우고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변측 기록에 의하면, 9월 10일 (음력 8월 7일)까지는 김제준이 문초를 받은 기록은 없다. 어쨌든 그는 처음 심문에서 입교 후 바쁜 농사일로 독실히 수계하지 못하였으나 5-6년 전에 나신부를 만난 후로 다시 열심히 수계하게 되었으며 나신부가 아들 김재복을 제자로 삼으려 함으로 마지못해 허락하였고, 또 우매한 나머지 나신부의 말을 믿고 아들을 타국까지 보내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또 지난 3월에조신철을 통해 아들의 편지를 받아 보았다고 하였다.

이렇게 그의 아들이 국법을 어기고 외국으로 나간 사실이 드러나게 되니, 사단(사건)은 커지고 죄목이 극히 중해져서 이후 형벌이 일층 혹독해졌을 뿐더러 이와같이 중대한 사건을 포총에 일임할 수 없어서 의금부로 보내어져 엄한 국문(심문)을 받게 되었다.

9월 13일(음 8월 13일)심문에 이어 이튼날 신장 15도의 형법을 받게 되어 김제준은 일시 배교하는 허약성을 드러냈다.
"지금에 와서 네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느냐?"
"어찌 생각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러한즉 뉘우치고 한하는 마음이 없느냐?"
"지금 와서는 추후로 뉘우칩니다."

이에 김제준이 시골의 한 우부로 사학의 저려한 일과 양인의 내력을 알지 못한 것인데 다만 몸만 심호한 뿐아니라,그 자식까지 학도록 허락하였으며, 정하상과 뭉칠 뿐만 아니라, 양인까지 신방하기를 그치지 아니한 사실을 깨닫고 뉘우치게 되었다는 결론을 내린 끝에 석방은 되지 않고 그들 형조로 보내어 위법처단하게 하였다.

그러나 옥에 있는 교우들은 그의 죄가 얼마나 큰가 하는것과 그러한 배교도 그를 놓아 주는 데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일러 주며, "놓아 주어나가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마십시오. 당신은 의심없이 처형될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돌려 당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재판관 앞에 나가 불신한 말을 한 것을 취소하고 치명자로 세상을 마치도록 하십시오"하고 거듭 권고하였다.
영생의 길과 갈바리아로 올라가는 길에서도 사람은 넘어질 수가 있는 것이요, 비록 신앙이 확실한 교우일지라도 그럴 수가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용감한 사도였으나, 넘어졌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보시는 시선에 부딪치자, 다시 일어났다. 김제준도 베드로와 같이 범죄하기 전보다 더 강한 자가 되어 다시 일어났다.

그가 배교한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진시미으로 통회경개하고 형관앞에 이르러 앞서 배교한 사실을 이렇게 취소하였다.
"양인을 데려온 것과 자식을 외국에 보낸 것은 모두 천주를공경하여 받들려는 까닭이었고, 일심으로 심혹하였으나 만사무석(萬死無惜)입니다."

이때에 세차례나 혹형을 당하였으나 다시는 마음을 굽히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을 말한다면 사실 1846년에 순교한 이들 중에 단 한 분인 이나라 성직자 최초의 조선인 신부의아버지에게 하느님께서는 이런 무쌍의 용기를 주신 것이 아니었을까?

드디어 9월 26일 조신철 등 9위가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치명하니, 그때 그의 나이 44세였다. 그러나 관변측 기록에슨 50세로 되어 있다.

여하튼 우리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김제준의 할아버지김진후가 1814년 순교한지 2년 뒤에 큰아버지 김한현이 순교하였으며, 23년 후에는 김제준 자신이 순교하고, 7년 뒤에는 그의 아들 김대건신부가 순교함으로써 32년 사이에 4대가 순교하는 비극과 영광을 함께한 가문이라는 사실이다.
호남교회사 연구소장 김진소 신부에 의하면, 김제준 가문의 순교자는 9명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