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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김임이 데레사     

 

 

 

 

 

 

    

 

성녀 김임이(데레사 1810-1846)

김임이 데레사는 서울 관부 물골에서 1810년에 출생하였다. 원래 부모가 교우였으므로 임이는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수계하였다. 임이는 무엇보다도 성인전 읽기를 좋아했고, 그들의 덕행과 모범을 열심히 본받으려고 했다. 그리고 교우집에 초상이 나면 만사를 제쳐놓고 가서 연도를 해줄 뿐더러 여교우일 경우에는 전혀 거리낌없이 손수 장사 지내고 그들을 위하여 오랫동안 기도하는 것을 자기의 직분으로 여겼다.

김임이는 나이 열일곱이 되었을 때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부모는 딸이 결혼하지 않으려는 것을 이상히 여기고결혼하도록 재촉하였으나, 게다가 더욱 친한 외교우인들이 이상히여기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임이는 자기몸을 피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여 왕비궁에 침모로 들어가서 3년동안 지냈다.

그 후 그는 궁궐에서 나와 나이 2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얼마동안 오라버니 김 베드로집에 머물러 있다가 이모집에서 살았다. 그리고 차례로 몇몇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 후 오라버니의 집에 가서 5년동안 이모와 함께 일을 하며 서로 도우면서 살았다.
왜냐하면 1839년에 순교한 오 바르바라의 양자 이문우 요한이 잡히기 전에 김임이 데레사에게 그의 양모를 돌보아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기 때문이다.

1845년 김대건 부제가 일시 귀국하여 들우물골에 거처를 정하게 되자 김임이는 이집으로 들어가서 가정부로서 김신부가 잡힐 때까
지 봉사하였다. 한번은 김 데레사가 동생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만약 신부님이 박해를 당하게 되면, 나도 신부님을 따르게 될 것이기 때문에 자헌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상관없어.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으니까"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1846년 봄 김신부가 잡힌 후 김임이는 현석문이 마련한 새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이어 급습하여 온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때는 7월 10일 오후 4시경이었다. 잡히기 전날 김임이는 동생 카타리나의 집에 갔었다. 동생이 자고가라고 붙들었지만 김임이는 "오늘밤 현석문 가롤로와 다른 교우들이 새 집으로 모여 일을 의논하게 되어 있으니 꼭 돌아가야한다"고 하며 떠나버렸다.

사실 김임이는 자신이 잡히게 될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함께 잡혀 온 네 명의 여교우중에서 김임이가 가장 용맹하였다.

임이는 동료들 사이에 어떤 분쟁이 일어나면 좋은 말로 화해시 키려고 노력하였고 동료들을 수시로 권면하여 그들의 고통을 이겨내도록 힘을 북돋아 주었다.

그리고 형벌을 참아내지 못하던 이 아가다가 김임이의 권고를 듣고, 비로소 끝까지 형벌을 참고 이겨내게 되었다. 옥에 있은 지 70일만인 9월 20일에 다른 동료들과 더불어 옥에서 교살되니 순교자와 동정녀라는 이중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이때에 그의 나이 36세였다.

그의 친척과 교우들이 수구문 밖에서 그의 시체를 찾아 그 근처에 매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