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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김유리대 율리에다     

 

 

 

 

 

 

    

 

성녀 김유리대(율리에타 1783-1839)


김 율리에타는 태중교우이며 본시 시골 출생이나 1801년 이전에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사와서 살았다. 1801년 신유박해가 발발했을 때 율리에타의 나이 17세였다. 이 때 부모가 출가시키려고 하자 율리에타는 스스로 동정을 지키려는 간절한 마음에서 가위를가지고 자기 머리털을 잘랐다. 그리고 머리털을 뽑아 버렸다고 한다.그러나 그의 부모는 딸에게 "머리털이 다시 자라나면 그 때 다시 의논해 보자"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사세가 어떨할지는 아직 예측하기 어려웠다.신유박해가 끝나자 부모는 다 냉담하여 고향으로 내려갔으나 율리에타는 함께 따라갈 마음이 없어 대궐로 들어가 궁녀의 하인이 되엇다. 기해일기에 보면 율리에타는 결혼나이가 되었을 때 부모가그를 출가시키려 하므로 동정을 지키기 위하여 집을 나와 서울로올라와서 궁녀가 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18세였다고 증언하고있다. 아뭏든 율리에타는 17-18세에 궁궐에서 지내게 되었고, 궁안에는 교우도 없었는데다, 미신도 많아서 수계를 제대로 못하고지냈으며 다만 배운 경문만 열심으로 외우는데 그치었다.

그러던 중 다행히 한 교우의 권고로 마침내 궁을 나오게 되었고그 때부터 신앙생활을 정식으로 영위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교우집에 의지하여 실장사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다가 차차 돈을 모아 분호조 뒤에 자그마한 집을 사서 거기서 홀로 거처하면서 기도와 묵상을 즐기는 한편 성사를 부지런히 보았다.

강하고 곧은 성격에 말과 행동이 아주 준엄해서 교우들이 매양조심하여 대하였고, 또한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결코 악을 향할여인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의 덕행을 칭찬해 마지 않았다. 기해년 박해가 한창일 때 율리에타는 혼자몸이어서 쉽게 피신할 수 있었지만 조용히 집에 남아 주명을 기다리며 치명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우들이 찾아오면 혹시 그가 해를 입지나 않을까 빨리 가자고 재촉하였다.

이렇게 포졸을 기다리고 있은 지 수개월 결국 7월 상순경에 포졸들이 들이닥쳐 잡혀갔다.포장이 김율리에타에게도 다른 여러 순교자들과 같이 엄포하였다.
"배교하고 동교인을 대라. 그리고 네 책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라,그렇지 않으면 모진 형벌을 당하리라."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을 고발하면 그 사람에게 사형을 내리실 것이니 나는 죽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이리하여 혹독한 매를 맞았으나 그의 용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의 판관은 처음에는 감언으로 꾀려했으나 나중에는 혹독한 형벌로 얼마간이라도 마음을 움직이는 표를 잡아 내려고 하여 세 차례나 몹시 매질을 시켰으나 율리에타는 조금도 신음하지 않고 참아받았다.

드디어 1839년 9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치명하니 동정과 순교의 월계관을 겸하여 받으니 그의 나이 56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