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성우 (안토니오 1794-1841)
김성우 안토니오는 1794년에 경기도 귀산(현 광주군 동부면 구산리)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이미 여러대 이 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며 꽤 부자소리를 듣고 지냈다. 삼 형제중 맏이었던
성우는 성품이 온순하고 너그러웠으며 아직 외교인이었을 때부터
모든이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 종손들이 고향에서 존경을 받으며
사는 것은 사람들이 그 증조부의 유덕을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김성우와 그의 형제들은 천주교에 대한 말을 듣자 그것을 알아보고 신봉하려 하였다. 어머니는 외교인으로서 세상을 떠났지만
아버지는 다행이 중년에 이르로 입교하여 선종하였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자녀들도 입교하게 되었고 김성우는 중국인 유신부로부터
직접 영세하였다.
그리고 친구들과 이웃사람들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마침내 귀산이라는 동네는 열심인 천주교부락이 되었다.
김성우는 고향에서 수계하는 것이 여의치 않을 뿐더러 성사를 좀더 용이하게 받으려는 의도에서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서울로 올라와 처음에는 누리골에 살다가 얼마후에는 동대문밖 마장안에 큰 집을 사서 이사하였다.
그리고 집에 조그마한 경당을 마련하고 한동안 신부를 모시기도 했다. 열심히 이웃을 권고하였고, 비록 자신의 생활이 넉넉하였을
지라도 세상 재물에 개의치 않았다.
그러는 동안 상처하고 열심한 교우를 둘째 부인으로 맞이하여 즐거운 가정을 이룩하는 한편 더욱 열심히 수계하였다. 그러던 중
그가 체포된 것은 기해년도 다 저물어가는 섣달 20일경이었다.(1841년 1월) 한 배교자의 고발로 포졸들이 들이닥쳐 성우와 그의 사촌 김 스테파노를 잡아갔다. 김 스테파노는 시골에서 다니러
왔다가 변을 당했고, 성우의 아내와 딸은 피신하여 귀산으로 돌아갔다. 그 후 성우의 집과 가산은 몰수당하였다.
한편 귀산에 살고 있던 두 동생은 박해가 일어나자 곧 잡히어 막내 동생 아우구스티노는 43세로 옥사하고, 맏동생은 옥중살이를
하고 있었다.
김성우 안토니오는 감옥을 마치 자기 집처럼 생각하고 여기서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하였고 따라서 옥중생활 15개월 동안 살아보겠다거나 석방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고 한다.
외교인 죄수들까지도 그의 설교를 즐겨 들었다고 하며 그의 설교가 아주 감명적이어서 그중 두 명이 입교하게 되었다. 한번은
문초때 성우가 판관에게 "당신의 모든 문초와 권고에 대해서 대답할 말은 한가지 뿐입니다. 즉 나는 천주교인이고 또한 천주교인으로서 죽겠습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포청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1841년 4월 말에 그는 다시 법정에 출두하여 곤장 60대를 맞았으나 그의 훌륭한 용기는 변함이 없었다.
마침내 이튿날밤, 즉 그달 29일 옥중에서 선종하니 그의 나이 47세였고 옥에 갇혀있기 실로 15개월이었다.
그의 시체를 거둔 교우들은 한결같이 그의 교수치명을 입증했다. 왜냐하면 김성우 안토니오는 목에 교수된 흔적이 뚜렷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시체는 귀산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김성우
성인은 처음 남한산성 옥에 갇히어 있다가 서울 의금부로 옮겨간것 같다.
이렇게 해서 1838년 말에 시작된 박해는 1841년 4월 29일 김 안토니오의 순교로 종말을 고하였다. 기해년의 박해는 강원, 충청,전라 등에 전반적으로 미쳤으나 무엇보다도 서울에서 가장 심하였고, 따라서 순교자가 가장 많이 나온 곳도 서울이다.
서울에서 대략 2백여명의 교우가 잡혀 그중 50여명이 참수되었으며, 60여명이 목이 졸리었고, 또는 매로 또는 병으로 옥사하였다. 이에 '기해일기'에 오른 순교자수는 78명으로서 그중 8명을 제외하고 모두가 성인품에 올랐다.
박해후 한국교회의 참담한 광경은 이루 표현키 어려운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는 세분의 목자를 모두 잃게 되어 다시
목자없는 고아가 되어버렸다.
유진길, 정하상, 조신철 등 지도급 평신도들도 거의 다 희생되었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히도 현석문, 이 베드로, 최 베드로 등 선교사의 측근자가 몇 명 살아남음으로써 이후 교회의 재건을 꾀하고선교사 영입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한편 선교사들은 이미 몽고에 와서 우리 신학생들과 함께 입국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페레올 신부가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김대건이 한국 최초의 사제로 서품되었다.
1845년 10월에 주교와 함께 입국한 김대건 신부는 이듬해 선교사들을 위한 새로운 입국로를 개척하고자 연평도 앞바다에 나갔다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붙잡혔다. 그래서 병오(1846년)박해가 시작되었다.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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