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女
고순이 (바르바라 1897-1839)
부인, 참수형(42세로 1839년 12월 29일 순교)
고순이 바르바라는 1801년 신유년에 순교한 고광성의 딸로서 1797년에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성격이 굳세고 또 대단히 총명한 여자였다. 불과 네 살되던 신년 큰 박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한가지로 열심히 수계하였다.
18세때 한 외교인이 고순이에게 구혼해 왔으나 그의 어머니가 허락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이로 인한 시비가 분분하였으나 고 바바라는 이 일을 용감히 물리치고 교우와 결혼하였는데 이가 바로 그보다 한 달 후에 순교한 박종원이다.
남편도 역시 순교자를 배출한 열심한 가문읗 후손이다.
부부 한가지로 열심히 계명을 충실히 지켰다. 궁색한 살림 중에도 그들의 화목함을 보고 모든 이가 탄복해 마지 않았다. 삼남매를 낳아 슬하에서 모두 열심한 시자로 키웠다. 이렇게 고순이는아버지의 피로 견고케한 신앙을 이어받아 자기 가정을 그리스도교
신자 가정의 모범으로 만들었다.
유신부의 입국을 계기로 하여, 성사를 잘 준비하여 받은 후로 열심을 배가하였다. 남편의 회장직무를 거들었고 자기 자신도 냉담자를 권면하고 무식한 교우들을 가르치며 가난한 이를 위로하고
병자를 간호하는 데 전심하였다.
기해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은 즉시 피신하였다. 8개월만에 집에 돌아온 남편은 결국 포졸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평소에 박해얘기를 들을 때마다 무서워 하던 고순이였지만 일단 남편이 잡히어 가자 치명예비를 하며 속히 잡히기를 원할 뿐더러
자원할 생각마저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으니,
이튼날 포교들이 들어닥쳐 붙잡힌 것이다.
이때 그는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꼬! 감사하며 위주 치명하자" 이렇게 혼자 말을 하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포청의 감옥에서 다시 만난 부부는 이같은 은혜를 주신 천주께 감사하고 서로 축하하며 바야흐로 열릴 고난의 길을 같이 용감히
걸어가자고 서로 격려하는 것이었다.
부부 한가지로 문초를 받고 고문을 당하였다.
부부 한가지로 용감히 형벌을 인내하며 감수했다. 그는 남편과 함께 여섯 차례에 걸쳐 혹독한 고문을 당하여 팔과 다리를 쓰지
못할 지경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순이는 화평한 안색으로 끝까지 이겨냈다. 그리고 10일 후에 형조로 보내졌다.
형조에서도 살이 떨어지고 뼈가 드러나 유혈이 낭자했으나 종시 굴복하지 않았다. 남편과 한가지로 사형선고를 받은 후 하옥되었다.
고순이는 말하기를 "평상시에는 치명이란 말만 들어도 무섭더니
성신의 은총으로 저같은 극한 대죄인을 도우시므로 이제는 겁도
안나고 도리어 기쁘다. 죽는 것이 이렇게 쉬운 것인 줄을 전에는
몰랐다" 고 하며, 평온하고 기쁨에 가득 차 죽을 날을 기다리며 하루에도 몇번씩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었다.
드디어 1839년 12월 29일 서소문 밖에서 동료 5명과 참수치명하니 그 때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고순이는 순교하는 순간에도 저 무한한 천주의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하며 칼을 받았다고 한다.
|